노화용 소장
노화용 소장

은퇴는 끝이 아니었다. 오히려 오래도록 품어온 삶의 향기를 천천히 우려낼 수 있는 새로운 계절의 시작이었다.

금융기관이라는 치열한 현장에서 경영관리본부장과 지점장으로 살아온 37년의 세월. 그것은 늘 숫자와 사람 사이에서 팽팽하게 균형을 잡아야 했던 긴장의 연속이었다. 성과를 관리하고 조직을 이끌며 하루하루 숨 가쁘게 달리다 보니, 뒤를 돌아볼 여유도 삶의 향기를 음미할 틈도 없이 계절은 덧없이 흘러갔다.

그러나 인생은 어느 순간 우리를 멈춰 세운다. 은퇴라는 이름의 쉼표 앞에서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인생이란 무엇을 얼마나 이루었는가보다, 어떻게 살아왔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묻는 끝없는 여정이라는 사실을. 퇴직은 사회가 내게 건넨 마침표가 아니라, 가장 나다운 삶을 다시 써 내려가라는 첫 문장이었다.

비움으로 채우는 일상

그날 이후 나의 시간은 조금씩 다른 결로 흐르기 시작했다. 젊은 날에는 세상을 배우기 위해 책을 읽었다면, 이제는 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 책을 펼친다. 옛사람들이 말한 위기지학(爲己之學), 곧 남에게 보이기 위한 공부가 아니라 스스로를 닦기 위한 공부가 내 일상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요즘 내 책상 위에는 늘 《반야심경》이 펼쳐져 있다. 흰 종이 위에 한 자 한 자 경전을 옮겨 적는 시간은 단순한 필사가 아니다. 글자를 따라 손이 움직이는 동안 번잡했던 생각들은 잔잔한 호수처럼 가라앉고, 마음은 어느새 고요해진다.

특히 ‘공(空)’이라는 한 글자는 오래도록 내 마음에 머문다. 비어 있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 아니라 무엇이든 품을 수 있는 가능성이며, 내려놓는다는 것은 잃는 일이 아니라 더 큰 자유를 얻는 일이라는 사실을 조금씩 배워간다. 평생 숫자를 채우며 살아온 내게 비움은 무척 낯선 언어였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삶은 채우는 기술보다 비우는 지혜 속에서 더욱 깊은 향기를 낸다는 것을.

이 지혜는 신영복 선생의《담론》을 만나며 구체적인 이정표가 되었다. 책장을 넘길 때마다 ‘머리에서 가슴까지보다 가슴에서 발까지의 여행이 더 멀다’는 문장이 오래도록 가슴을 울렸다. 아는 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일, 그 한 문장이 은퇴 이후 내 삶의 나침반이 되었다.

가슴에서 발까지, 나눔의 여정

책에서 얻은 깨달음은 일상 속에서 비로소 완성되었다. 매주 금요일이면 앞치마를 두르고 제빵 봉사에 나선다. 밀가루를 반죽하고 오븐의 온기를 지키며 갓 구워낸 빵을 정성껏 포장하는 시간은 이제 내 삶에서 가장 따뜻한 의식이 되었다. 빵 한 덩이는 작지만, 누군가에게는 하루를 견디게 하는 다정한 위로가 될 것이다.

간간이 참여하는 밥차 봉사에서도 같은 온기를 만난다. 따뜻한 국 한 그릇을 건네며 마주치는 눈빛 속에서, 사람을 살리는 것은 거창한 수식어가 아니라 진심 어린 마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반야심경》을 통해 배운 비움은 이렇듯 봉사를 통해 베풂으로 채워지고 있었다. 내 안을 비울수록 오히려 사람을 향한 품은 더욱 넉넉해졌다.

오랜 세월 몸담았던 농협과의 인연도 여전히 소중하게 이어지고 있다. 00농협 컨설팅 자문위원으로서 경영관리와 종합청사 건립 프로젝트에 작은 경험을 보태며 후배들과 함께 미래를 그려간다. 현장을 떠났다고 해서 역할까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제는 앞장서기보다 뒤에서 든든하게 받쳐주는 사람이 되는 일, 경험을 권위가 아니라 나눔으로 전하는 일이 내게는 더 큰 보람으로 다가온다.

젊은 날에는 성취가 삶의 목표였다면, 지금은 사람을 남기는 일이 삶의 기쁨이다. 그래서 은퇴 이후의 삶은 단순한 쉼이 아니라 또 다른 책임이며, 경쟁이 아니라 아름다운 나눔이다. 인생의 깊이는 얼마나 많이 가졌는가가 아니라, 얼마나 따뜻하게 나누었는가에 있었다.

낯선 길 위에서 넓어지는 시선

삶은 익숙한 자리에서 깊어지지만, 낯선 길 위에서 더욱 넓어진다. 그래서 나는 틈이 날 때마다 길을 떠난다. 국내의 호젓한 산과 바다를 찾기도 하고, 때로는 낯선 이국의 골목을 천천히 거닐기도 한다. 내게 여행은 관광이 아니라 또 다른 배움이다. 오래된 성당의 종소리, 이름 모를 시장의 활기, 골목 끝 작은 카페에 스며든커피 향까지도 마음에 차곡차곡 쌓여 삶의 다채로운 교과서가 된다.

길 위에서는 누구나 겸손해진다. 세상은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넓고, 사람은 내가 경험한 것보다 훨씬 다양한 삶을 살아간다는 사실을 여행은 조용히 일깨워 준다. 돌아올 때마다 나는 조금 더 낮아지고, 조금 더 너그러워진다. 여행은 결국 풍경을 바꾸는 일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는 시선을 바꾸는 일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오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공간인 서재 겸 접견실에서 또 하나의 여행이 시작된다. 원두를 고르고, 드리퍼를 데우고, 물의 온도를 맞춘 뒤 천천히 첫 물줄기를 올리는 순간, 세상의 시계도 함께 느려진다. 에티오피아 원두의 화사한 꽃향기와 케냐 원두의 깊고 묵직한 풍미가 공간을 채우면, 집 안은 비로소 아늑한 살롱이 된다.

人生을 드립하다

커피는 서두른다고 해서 좋은 맛을 내지 않는다. 물을 너무 빨리 부어도, 너무 늦게 부어도 본래의 고유한 향을 잃고 만다. 사람의 삶도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너무 앞서가려 하면 소중한 것을 놓치고, 너무 조급하면 자신만의 향기를 피워내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핸드드립을 할 때마다 인생을 배운다. 천천히, 그러나 정성을 다해. 한 잔의 커피에는 기다림이 담기고, 기다림 끝에는 비로소 눈부신 향기가 피어난다.

그 향기를 사이에 두고 찾아오는 벗들과 삶을 이야기하는 시간은 더없이 소중하다. 지나온 세월의 열정과 실패, 기쁨과 아쉬움,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 대한 소박한 희망을 나누다 보면 커피는 어느새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따뜻한 다리가 된다.

그 여정에는 내 마음의 결을 깊이 이해해 주는, 영혼의 온도가 비슷한 소중한 인연들이 함께하기에 내 삶은 조금 더 따뜻하고 깊어질 수 있었다. 밤이 찾아오면 침대에 누워 평소 마음에 새겨둔 문장들을 천천히 되뇌어 본다.

어떤 날은 윤동주의 순수한 시심으로 돌아가 <별 헤는 밤>을 통해 지난 삶을 돌아보고 나 자신의 마음을 하나씩 살펴본다. 밤이 깊을수록 새벽이 가까워지듯, 순수한 마음만은 잃지 않겠다는 다짐을 한다.

어떤 날은 정호승의 <수선화에게>를 통해 외로움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자연스러운 감정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고통과 외로움을 피하기보다 견디는 과정에서 사람이 성숙해지며, 희망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견디는 삶 속에서 피어난다는 따뜻한 위로를 품는다.

또 어떤 날은 새뮤얼 울먼의 <청춘>을 떠올리며 나이보다 마음이 먼저 늙지 않기를 조용히 다짐한다. 문득 떠오르는 어떤 시는 눈 깜짝할 사이처럼 짧은 삶이지만, 순간 온 힘을 다해 찬란한 빛을 발하는 윤슬처럼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오래 남는 향기로운 사람이 되라고 말해준다. 삶의 마지막보다 오늘을 더욱더 아름답게 살아갈 것인지 묻는 시의 문장들은, 길이는 짧지만 울림은 길게 가져다준다.

이처럼 좋은 시 한 편은 하루를 비추는 등불이 되고, 한 줄의 문장은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힘이 된다. 나는 시를 외우는 것이 아니라, 시가 가르쳐 준 맑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싶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은 한 잔의 핸드드립 커피를 참 많이 닮았다. 젊은 날에는 뜨거운 물처럼 치열한 시간을 통과했고, 중년에는 책임이라는 무게를 견뎠으며, 이제는 그 모든 세월이 천천히 우러나 나만의 향기가 되었다. 《반야심경》은 내게 비우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봉사는 나누는 기쁨을 일깨워 주었으며, 여행은 세상을 넓게 바라보는 눈을 열어 주었다. 커피는 사람을 환대하는 마음을, 시는 영혼을 맑게 하는 시간을 선물해 주었다. 그 모든 순간이 모여 오늘의 나를 만들었다.

이제 나는 인생을 서둘러 완성하려 하지 않는다. 오늘 마시는 한 잔의 커피를 정성껏 내리고, 오늘 만나는 한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며, 오늘 주어진 하루를 감사히 살아내는 것, 그것이면 충분하다.

좋은 커피가 오래 남는 것은 향기 때문이고, 좋은 사람을 오래 기억하는 것은 특유의 따뜻함 때문이다. 나 또한 누군가의 기억 속에 은은한 커피향처럼 오래 머무는 사람이기를 소망한다.

오늘도 나는 드리퍼 위로 조용히 물을 붓는다. 한 방울, 또 한 방울. 서두르지 않는 시간 속에서 원두가 비로소 제 향기를 세상에 내어놓듯, 사람도 삶이라는 뜨거운 시간을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자신만의 깊은 향기를 품는다.

나는 오늘도 커피를 내린다. 아니, 어쩌면 커피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 남은 인생을 정성스럽게 드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2026년 7월

예당 & 휘게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