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미영 모임장
김미영 모임장

<편집자 주> 걷다 보면 익숙했던 당진의 풍경도 새롭게 보인다. 해나루 당진여성걷기모임 김미영 모임장을 통해 당진 곳곳의 길을 걸으며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당진둘레길의 매력을 여러 편에 걸쳐 소개한다.

여름의 한가운데를 관통하는 오후의 공기는 묵직하다. 터미널을 나서 버스에 몸을 싣는다. 덜컹거리는 버스 창가에 이마를 대면, 엔진의 진동과 함께 여름날의 열기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목적지인 입암교차로로 가기 위해 한 번의 환승을 거치는 동안, 차창 밖 풍경은 삭막한 회색 건물에서 차츰 싱그러운 연두와 초록의 그라데이션으로 옷을 갈아입는다.

입암교차로
입암교차로

교차로의 소음을 뒤로하고 사기장골길로 접어든다. 사기그릇을 굽던 옛 가마터가 있었을 법한 다정한 이름의 길. 초입부터 길가에 흐드러지게 피어난 개망초꽃들이 하얀 계란후라이처럼 머리를 맞대고 서서 반긴다. 길 양옆으로 우거진 숲이 이내 짙은 그늘을 드리워 준다.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서도 숲이 뿜어내는 특유의 서늘한 기운이 살결에 닿는다. 한 걸음 뗄 때마다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여름 걷기는 이 땀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일에서 출발한다. 몸속의 묵은 온기가 땀을 통해 빠져나가고, 그 자리에 숲의 맑은 숨이 채워지는 기분 좋은 해방감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사기장골의 나지막한 오르막을 지나 장파능선길에 올라선다.

사기장골 들머리
사기장골 들머리

능선에 닿자마자 거짓말처럼 어디선가 불어온 한 줄기 산바람이 젖은 머리칼을 쓸고 지나간다. 숲의 정수리를 스치고 온 바람은 도시의 에어컨 바람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청량하다.

발밑에 밟히는 부드러운 흙과 말라붙은 낙엽의 바스락거림이 발걸음에 리듬을 더한다. 사방에서는 매미들이 여름의 절정을 악을 쓰듯 노래하고 있다. 그 소리가 너무 우렁차서 오히려 마음속 잡음들이 고요하게 묻혀버린다. 능선길은 인생의 완만한 곡선을 닮았다. 가파르지 않게, 서두르지 않고 그저 묵묵히 걸으면 그뿐인 길이다.

나뭇가지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당진의 나지막한 산세와 푸른 논밭이 눈을 시원하게 적셔준다. 땀이 흐르고 마르기를 반복하는 동안, 내면의 생각들도 단순하고 투명하게 정돈되어 간다.

깊은 초록을 품고 있는 숨어골능선길에 다다랐을 때,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이름 그대로 세상으로부터 꼭꼭 숨어 있는 듯한 고요함이 지배하는 곳이다. 울창하게 뻗은 참나무와 소나무 가지들이 하늘을 완전히 가려 거대한 초록색 지붕을 만들었다. 이곳의 햇살은 잎사귀라는 촘촘한 필터를 거쳐 연둣빛 가루처럼 바닥으로 흩뿌려진다. 마치 비밀스러운 숲의 궁전에 들어선 것 같은 묘한 설렘이 인다. 가만히 서서 숨을 깊이 들이쉬어 본다. 진한 흙 내음과 피톤치드의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든다. 자연이 주는 가장 사치스러운 휴식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속도의 시대에 이토록 느리게 걷는 사치를 누릴 수 있음에 가슴 깊이 감사함이 차오른다. 비밀 같은 숨어골을 내려와 완만한 내리막인 감골길로 접어들자, 시야가 넓어지며 다시 사람 냄새 나는 마을 풍경이 나타난다. 길가 밭둑에 정답게 심어진 고추며 가지들이 여름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다. 멀리서 들려오는 시골 진돗개의 우렁찬 짓음 소리가 평화로운 오후의 정적을 깨뜨린다.

어느덧 하늘은 푸른빛을 조금씩 잃어가며 부드러운 살구색과 금빛으로 물들기 시작한다. 여름날 오후의 뜨겁던 열기도 대지의 호흡 뒤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었다.

당진3동둘레길 원당.시곡구간
당진3동둘레길 원당.시곡구간
감골(시곡동)길
감골(시곡동)길

대략 6킬로미터, 두 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속세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숲의 시간을 살다 온 듯한 기분이다.

시곡교
시곡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