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걷다 보면 익숙했던 당진의 풍경도 새롭게 보인다. 해나루 당진여성걷기모임 김미영 모임장을 통해 당진 곳곳의 길을 걸으며 자연과 역사, 문화가 어우러진 당진둘레길의 매력을 약 10여 편에 걸쳐 소개한다.

당진 시외버스터미널을 출발하면 도시의 분주함은 오래가지 않는다.
동부로를 따라 걷는 발걸음은 어느새 생활의 풍경에서 역사와 자연이 어우러진 길로 접어든다.
오늘의 여정은 태백산 기우단과 모동성황당, 자은동 능선길을 지나 윤곤강의 묘소를 거쳐 당진천과 아미미술관 버스정류장에 이르는 약 9km의 길이다.
거리는 짧지만, 그 안에 담긴 시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첫 번째 발길을 멈추게 하는 곳은 태백산 기우단이다.

오래전 극심한 가뭄이 들면 이곳에서는 하늘에 비를 청하는 제례가 올려졌다.
농업이 삶의 전부였던 시절, 비는 곧 생명이었고 기우제는 마을 사람들의 간절한 공동체 의식이었다.
지금은 제단만 남아 있지만, 돌 하나에도 풍년을 염원했던 선조들의 마음이 배어 있다.
눈앞에 펼쳐진 당진 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자연 앞에서 겸손할 수밖에 없었던 옛사람들의 삶이 떠오른다.

기우단에서 조금 더 오르면 모동성황당이 모습을 드러낸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던 성황당은 오랫동안 지역민들의 정신적 버팀목이었다.
비록 예전만큼 많은 사람들이 찾지는 않지만, 오래된 나무와 돌무더기에서는 지금도 마을을 지켜온 신성한 기운이 느껴진다.
화려한 문화재보다 이런 작은 신앙의 흔적들이 오히려 지역의 역사를 더욱 생생하게 들려준다.
이어지는 갈뫼 능선길은 이번 여정의 백미다. 완만한 숲길을 따라 걷다 보면 바람이 먼저 말을 건네고, 숲은 계절마다 다른 색으로 길동무가 되어 준다.
능선 사이로 보이는 당진 시가지와 넓은 평야, 멀리 서해의 풍경은 도시와 자연이 공존하는 당진의 모습을 한눈에 담게 한다.
숨이 차오를 즈음 만나는 전망은 걷는 사람에게 가장 큰 선물이다.

능선을 내려오면 한국 현대시를 대표하는 시인 윤곤강의 시비를 만난다.
당진이 낳은 문학인의 숨결을 기리는 이곳에는 대표작인 「언덕」이 새겨져 있어 잠시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짧은 시 한 편이지만 고향의 풍경과 삶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담겨 있어, 숲길을 걸으며 마주한 자연과도 묘하게 어우러진다.
역사 유적이 과거를 기억하게 한다면, 시비는 지역의 문화와 문학을 현재로 이어주는 소중한 문화자산이다.

물길은 도시를 가로지르지만 언제나 한결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하천변 산책로에는 운동을 즐기는 시민들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 계절 꽃을 사진에 담는 이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진다. 역사의 길을 걸어온 발걸음은 어느새 현재의 일상 속으로 스며든다.
오늘 걷기의 종착점은 아미미술관 버스정류장이다. 폐교를 문화예술 공간으로 되살린 아미미술관은 여행의 마지막 쉼표가 되기에 충분하다.
오래된 교실과 운동장은 전시와 예술을 품으며 새로운 생명을 얻었고, 여행자는 그 공간에서 또 다른 시간을 만난다.

걷기는 목적지보다 과정이 아름다운 여행이다.
불과 9km 남짓한 길이지만 그 안에는 자연과 역사, 문학과 예술이 한 줄기 이야기처럼 흐른다.
당진의 길은 오늘도 말없이 그 시간을 품고 걷는 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