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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텍사스 부호의 열차를 마적떼가 습격한다. 금고를 털어 나오다 아리따운 마님에게 한 눈에 반한 마적 두목은 그녀를 납치한다.

불상놈 마적에게 단식으로 저항하는 지체높은 마님의 자존심을 꺾기 위해 두목은 밥을 굶기고, 며칠을 못 먹게 돼 헛것이 보이는 마님은 눈 앞에서 어른거리는 통조림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 이를 빼앗아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남김 없이 통조림을 먹어 치운 마님은 마적두목 앞에서 겸연쩍게 키득거리고…

저격수들을 고용해 납치된 아내를 찾아 나선 텍사스 부호는 계급의 외투를 벗어던지고 원형질의 '남과 여'로 만나 연인으로 변해버린 두 사람을 발견하고 질투와 상처받은 자존심에 미쳐버린다.

며칠째 마적떼를 추적해 한명 한명 쏘아 죽인 부호는 드디어 말을 타고 사막을 도주하는 두 남녀를 저격하고… 마님과 마적은 메마른 사막에서 손을 잡은 채 숨을 거둔다.”

벌써 20년도 전에 ‘주말의 명화’에서 방영한 서부영화다. 미국판 인 셈이다. 계급의 벽을 넘은 남과 여의 사랑 이야기는 시대를 초월한 단골 레퍼토리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만만하던가?

‘반듯한’ 도련님과 창녀는 연인으로 만나지 않고, 강남녀와 강북남은 섹스를 나누지 않으며, 수십년간 대통령의 고향이었던 지역과 백성노릇만 해온 지역의 집안은 사돈을 맺지 않는다. 여대생과 깡패가 연인이 되는 것은 더구나 가당치 않은 노릇이다. 계급의 외투를 벗어던지기 전에는…

멀찌감치 떨어져 선화를 훔쳐보는 김기덕의 카메라에서는 학벌사회의 변두리에서 국졸 출신 감독으로 소외를 받아 온 남자의 고통스런 시선을 느낄 수 있다.

예쁜 선화를 사모하는 한기는 그녀에게 덮인 여대생이란 외투를 벗겨내기 전에는 사랑을 할 수가 없다. 사창가에 넘겨 드디어 창녀와 깡패라는 밑바닥 인생으로 만난 다음에야 두 사람은 원형질의 남과 여로 마주설 수가 있는 것이다.

극장에 들어선 수많은 ‘여대생’들은 김기덕 감독의 손에 겉옷에다 속옷까지 벗기운 채 당혹스런 알몸으로 부들부들 떨고 있다. 감히 양가집 규수를 욕보였다고 호통을 칠 지 아니면 계급의 외투가 벗겨진 자신의 알몸에서 원형질의 사랑을 발견할 지 감독이 책임질 일은 아닐 것이다.

선화와 한기의 사랑은 물론 한국사회의 혹독한 계급차별의 벽을 넘어설 수 없다. 두 사람의 사랑이 환상의 세계에서나 맺어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던 셈이다.

어떤 이는 김기덕 감독의 영화가 짜증스런 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판하지만 냉엄한 학벌차별의 현실이 한국사회에서 사라지기 전에는 국졸의 김기덕 감독은 백편, 천편의 영화를 만든다 해도 결국 똑같은 이야기를 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오마이뉴스 제공 /민경진 기자 / kjean_min@yaho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