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일●내포(內浦)에 천연두(天然痘)
충청남도 서산, 당진지방에는 지난 달부터 천연두 병자가 점차로 발생되어 2월 그믐까지 예산, 천안, 아산에 도합 75명이나 된다는데 지금부터 더욱이 그 병이 퍼질까 염려하여 도경찰부에서는 보통 5월에 종두(種痘)넣는 것을 앞당기어 4월1일부터 관내 각 군에 대대적으로 실행할 터이라 하며 방금 천연두외에 전염병으로는 강경, 부여, 대전에 홍역 등이 유행한다더라.
(동아일보 1923년 3월 11일)
13일
충남 소작인 조합
충청남도에서 본년에 신설할 국유지 소작인조합의 예정지는 목하 조사중인데 기설 조합의 관계 병 국유지 집단의 상황 등을 참작하여 연산, 천안, 예산, 면천 4군내에 각 1개소씩 적당한 지를 선정하여 설치하기로 대략 결정하였다더라.
(매일신보 1913년 3월 13일)
당진 개간 준공
경성부 남미창정 화전준일(和田準一)씨와 당진 여야정부(餘野貞夫) 양씨의 경영으로 충남 당진 오도 삼백여 정보의 간척지개간사업은 차를 기공 1연만에 준공이 되었음으로 금춘에 준공식까지 거행하리라더라.
(동아일보 1928년 3월 13일)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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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3월14일(음력 2월12일)∼15일은 150여 소난지도 의병들이 일제에 맞서 싸우다가 모두 전사한 날이다.
소난지도 의병항쟁의 주인공은 홍일초(洪一初)로 일찍이 경기도 수원, 용인등지에서 당진출신의 정주원 의병장과 연합하여 활동하고 있었다. 일제는 1907년 9월부터 대한제국에 대한 식민통치를 준비하기 위하여 우리의 의병을 진압하는 이른바 초토화작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홍일초의병장은 수원의 남부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항전하고 있었는데 난지도, 소난지도, 영종도, 대부도, 풍도 등이 주요 거점지로 이용되었다. 특히 이 지역은 전통적으로 충청도, 전라도 지역에서 생산된 곡물이 조세곡으로서 서울로 올라가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이 때문에 수적(도적)이나 우리의 의병이 자주 출몰하던 곳이었다(『대한매일신보』 1906년 2월 7일자, 1907년 2월1일자에는 대부분 수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3월 14일, 일제의 1개 소대 병력은 솔가지로 위장한 배를 이용, 우무도(牛舞島)와 소난지도 사이로 들어왔고 의병들은 이에 맞서 하루종일 총격전과 육탄전을 전개하였는데 결국 다음날 3월15일 150여 의병이 전원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당시의 증언을 재인용하면 “섬 동쪽에서 온종일 총소리와 비명이 들렸다 하고 화약연기가 섬을 뒤덮었으며 맞은 편의 석문면 교로리와 초락도에서는 의병들의 유해가 그물에 걸려 올라왔다”고 한다.
1974년 석문중학교에서는 신양웅(현 교장)을 중심으로 흩어진 유골을 모으고 봉분을 쌓아 의병총을 조성하였고 1982년에는 의총비를 세웠다. 현재 소난지도 의병항쟁기념사업회가 구성되어 추모행사를 거행하고 있으며 고증작업을 다각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이러한 항일 항쟁의 정신은 3.1운동으로 이어지는데 1919년 3월17일자 『매일신보』에 보면 면천에서 3·1운동이 일어났음이 보인다. 당시의 기사 내용은 ‘당진군 면천읍내 공립보통학교 학생 일동이 모여 국기를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불렀는데 군수와 경찰서에서 엄중히 설유(說諭) 해산하였더라’이다.
또한 1919년 3월26일자 『매일신보』에도 같은 기사가 있는데 ‘(지난) 10일 오후 3시경에 당진군 면천보통학교 생도 약 이백 명이 구한국 국기를 학생 선두에 세우고 시위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주모자 2명은 면천경관 주재소에 인치되고 해산하였더라’라고 하였다.
이를 통하여 보면 면천공립보통학교(현재의 면천초등학교) 학생만세운동은 1919년 3월10일에 일어났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주인공은 원용은(元龍殷), 박창신(朴昌信)으로 당시 면천공립보통학교 4학년 재학생들이었다. 이들은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하여 태극기와 현수막을 준비하고 학생들을 주도하면서 동문밖 저수지에서부터 면천 시내로 시위하면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일제 경찰에 의하여 시위는 중단되고 해산되었는데 원용은과 박창신은 4개월간 수감되기도 하였다.
충남에서의 3·1운동으로는 예산에서 3월3일 일어난 만세운동이 맨 처음이고 3월10일의 면천 학생만세운동은 당진지역에서 일어난 3·1운동으로서 처음으로 보여진다. 이와 같은 크고 작은 만세운동이 일어나다가 결국 1919년 4월 4일에 천의시장에서 대대적인 만세시위운동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난지도에서의 의병항쟁과 면천에서의 학생만세운동, 천의만세운동은 모두 당진인들의 투철한 애국정신을 보여주는 값진 의거들이다. 시골에서 발생하여 대외적으로 크게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이들이 모여 우리나라를 일제로부터 되찾고 오늘의 우리가 있게 하는 기초가 되었다.
자료조사 : 김남석(nsk60@hoseo.hs.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