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훈 감독의 데뷔작 에 나오는 사랑은 설레임이나 지고지순한 애정이 아니다. 그 사랑은 광기이며, 목숨이다. “미치도록 그리웠고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헤드 카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대진(이병헌 분)의 인생에서 사랑은 전부다.

또 대진에게 사랑은 공기다. 사랑이 사라지는 순간, 대진은 숨을 거둘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그래서 관객들은 대진의 광기에 질리면서도, 대진을 향한 애틋한 마음을 가지게 된다.

영화가 절정에 다다랐을 때, 상황은 반전된다. 에서 말하고자 하는 ‘사랑의 정의(定義)’가 바로 그 순간 드러난다.

두가지 종류의 반전

영화를 보고 나오며 자꾸만 필자의 뇌리에 아쉬움이 남았다. “영화 속 반전이 과연 효과적이었을까?”, 혹은 “감독이 너무 반전에 집착한 것은 아닐까?” 자꾸만 의문들이 떠올랐다. 영화 속 반전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직장에서 집으로 돌아온 아내가 샤워를 하고 있다. 살며시 문이 열리더니 칼을 든 복면의 남자가 들어온다. 남자는 샤워실로 들어가 아내를 죽이려고 한다. 난투극이 벌어지고, 아내는 천신만고 끝에 킬러를 죽인다. 초죽음이 된 아내가 킬러의 시신 옆에서 공포에 질려 울먹이고 있을 때, 남편이 귀가한다. 남편은 아내를 진정시키고 경찰에 신고한다. 아내는 남편의 품에 안겨 울음을 터뜨린다.

위와 같은 극적 상황을 가정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점은 킬러를 보낸 사람이 바로 ‘남편’이라는 사실이다. 과연 관객이 남편이 범인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 아니면 관객이 살인사건이 미수로 그친 그 시점에서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 더 효과적일까?(이상의 가정은 ‘퍼펙트 머더’를 바탕으로 필자가 재구성한 것임)

필자는 두번째 경우가 더 효과적이라고 본다. 관객이 그 사실을 알게 되는 순간부터 남편의 모든 행동들은 새로운 의미를 부여 받는다. 왜냐하면 그의 웃음과 위로는 모두 거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남편이 진실을 숨기는 모든 행동들이 관객들의 반응을 곧장 이끌어낼 수 있게 된다.

이와 달리 첫번째 경우는 커다란 절정의 반전을 위해 관객들이 내내 영화에 집중해야 하는 부담감이 생긴다. 이 뿐만 아니라 영화 후반부에서 영화 전반부의 행동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다시 설명해주는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영화의 구성이 매끄럽게 유지되기 어렵다.

영화를 진행시키면서 감독이 알맞게 단서를 숨기는 것은 영화적인 재미를 배가시킨다. 하지만 은 첫번째 경우의 반전을 택함으로써 너무 관객들을 지루하게 만들었다.

도덕적이지 않은 사랑

대진의 광기어린 사랑은 영화 속에서 잘 드러나 있다. ‘광기어린 사랑’이 표현하기 어려운 설정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또한 입체적이지는 못하지만 기존 영화의 비틀기를 통해 재미를 가중시키는 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 속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자꾸만 눈에 거슬렸다.

소품 하나로 반전이 이루어지는 점이나, 예주(박선영 분)의 이해심이 갑자기 증폭되는 점, ‘임신’이라는 설정을 감안한다고 하더라도 은주(이미연 분)의 선택이 대진의 선택만큼이나 부드럽게 넘어가는 점은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아쉬운 것은 라스트신이었다. 대진이 꼭 눈물을 터뜨릴 필요가 있었을까. 그건 그냥 관객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할 요소였다.

반전에 집착한 감독이 대진의 사랑에 대해 도덕적으로 변명을 해주는 라스트신은 ‘광기어린 사랑’을 다루는 영화의 라스트신으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아무리 변명의 눈물을 흘린다고 해도 대진의 사랑은 도덕적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사랑이다.

필자의 눈엔 감독이 라스트신에서 변명을 시작하는 순간, 오히려 ‘대진의 사랑이 집착이며, 상대를 소유하기 위한 이기심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감독은 ‘도덕적인 사랑’에 대해서도 집착하고 있었다.

오마이뉴스(www.ohmynews.com)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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