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의 국가가 성립되기 위해선 3대요소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영토와 국민 그리고 주권이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일제식민지 치하에 들어가 36년이란 긴 세월 동안 그들의 노예가 된 것은 영토와 백성은 있되 주권을 빼앗겼기 때문이다.

당시 의정서 조인은 총리대신인 매국노 이완용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나 엄격히 말해 일본이 을사조약(1905년), 정미7조약(1907년)으로 외교권과 행정권, 사법권을 차례로 박탈해 나가던 조선 말의 더 큰 책임은 조선의 마지막 임금 순종황제에게 있다 할 것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1906년에 임명된 초대 통감)를 황태자(영친왕)의 스승으로 임명하고 그를 “동양 평화의 개척자”라고 칭송하는가 하면 1909년(순종3년) 10월26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의 총에 이토가 죽었을 때 일본황제와 이토의 부인에게 전보를 보내 “오늘 이토공작이 하얼빈에서 흉악한 역도(안중근)에게 화를 당했다는 보고를 받고 놀랍고 통분한 마음 금할 수 없습니다. 삼가 지극히 동정하는 뜻을 표시하는 바입니다.”라고 위로했다. 또한 이틀 뒤 이토에게 문충공이란 시호를 내리며 “이토는 뛰어난 기질에 세상을 구제할 지략을 지녔으며, 시대의 운수를 만회시키고 문명을 발전시키는 일에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일찍부터 우리나라를 오갔는데 위태롭고 어려운 국면을 부지하고 수습한 것은 전적으로 그의 계책에 기인한 것이다. 죽은 이토태사의 상사에 의친왕(고종의 6남)이 강을 보내 제사를 지내주고 장사에 소용되는 물품을 궁내부에서 실어보내며 문충공이란 시호를 특별히 주도록 하겠다”고 크게 애도하며 국가예산에서 10만원(당시 태백산성 사고 건립비가 7,200원)이란 거금을 부조금으로 전하고 이토의 5주기 제사에 또다시 1백원을 하사했다.

그 시기에 이 땅의 민중들은 의병궐기, 테러암살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웠으나 국가지도자들은 일본에 아부하고 외세에 맞서 싸우는 동학교도들을 토벌한 공로로 훈장과 상금을 내리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했으며, 궁 밖에서는 일본헌병의 총칼에 백성이 수없이 쓰러져가는 그 살벌했던 시대에 나라의 지도자와 대신들은 그림 감상이나 하고 음풍농월에 빠져 있었으니 어찌 나라가 망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요즘 여중생 2명의 미군 장갑차 사망사고와 관련, 관제병과 운전병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파렴치로 온 국민들이 통분하여 미 대통령의 공개사과와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집회가 계속되고 있다. 미군에 의한 범죄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소위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은 불평등협약으로 개정이 필요한데도 미국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사고를 냈다면 한국의 법에 따라 엄정한 처벌을 받아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당시 불평등 협정임을 알면서도 조인한 이 나라의 협정당사자들의 행태는 한·일과 맺었던 정미7조약의 조인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미·소냉전시대에 유지됐던 힘의 균형이 소련의 붕괴 이후 미국으로 급속히 기울어 그들은 무소불위의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자국의 이익을 위해선 그 어떠한 횡포도 거침없이 저지르고 있다.

작년 9.11테러사건 이후 그들은 이성을 잃고 있으며 후세인을 제거하기 위한 조사작전이 중동의 석유를 좌지우지하기 위해서라는 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이다.

우리는 어린 중학생들의 주검 앞에 미국을 원망하기에 앞서 군사, 행정, 사법 등 주권을 내준 권력층의 책임에 더 큰 분노를 느끼며 국론을 하나로 묶어 주권을 다시 찾는 일에 힘을 모아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이번 대선에서 제대로 된 대통령을 뽑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며, 모두가 투표에 참여해 국민주권을 행사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