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남매가 알록달록 색칠을 해서 벽에 걸어놓은

비어있는 큰 양말을 생각한다. 큰 물감을 선물로 받고 싶었던

남매의 작은 꿈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고요한 성탄절 밤,

산타를 믿는 남매의 꿈속에서 과연 산타는 그림자라도 보여줄까...’

남매의 비어있는 양말

밖에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선 어느 채널을 돌려도 산타클로스의 모습이 보였고 거리의 여기저기에선 캐롤이 울려 퍼졌다. 케이크와 선물을 고르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조금 들떠 보였다. 무슨 선물을 받았던 것일까. 찬바람에 코끝이 빨갛게 익은 아이들은 크리스마스 트리의 불빛만큼이나 행복한 표정이었다.

날은 금새 어두워졌고 가로등 밑으로 성긴 눈발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한들거리며 지상에 내려앉았다. 낮의 들썩거림만큼이나 고요해진 성탄절 밤. 간혹 옷깃을 추린 사람이 늦은 귀가를 서두를 뿐 거리는 한적하고 또 휑뎅그렁했다.

이렇게 늦은 밤, 대원이(당진초 2)와 연옥이(당진초 병설유치원)의 크리스마스는 어땠을까를 생각한다. 그들 남매가 알록달록 색칠을 해서 벽에 걸어놓은 비어있는 큰 양말을 생각한다. 큰 물감을 선물로 받고 싶었던 남매의 작은 꿈을 생각한다. 그리고 또 생각한다. 고요한 성탄절 밤, 산타를 믿는 남매의 꿈속에서 과연 산타는 그림자라도 보여줄까...

대원이의 다리를 병들게 한

무혈성괴사증

대원이네 집을 찾았을 때 지난달 새끼를 출산한 어미개 푸푸가 앙칼지게 짖어댔다. 양명순(44)씨가 마중 나올 때까지 푸푸는 기자의 접근을 막으며 야무지게 제 주인네들을 지켰다. 양명순씨를 따라 들어간 방, 한 평이 채 넘을까 말까한 그 작은 공간에 대원이와 연옥이가 그들 남매만의 조용하고 아담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있었다.

유난히 키가 작은 9살의 대원이는 7살의 연옥이와 그만그만해 보였다. 언뜻 보면 연옥이가 손위처럼 보일 정도로 대원이는 앳되고 작은 소년이었다. 죄 없는 그 작은 소년은 그러나 걸을 수 없다. 목발을 짚어야만 그나마도 위태롭게 조금씩 나아갈 수 있을 정도다. 자신의 의지와 힘만으로는 집밖을 한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대원이. 대원이를 만난 지난 25일, 발목까지 쌓인 눈과 캐롤이 어우러진 밖은 흥겨운 정취가 흐르고 있었다. 그날 아침, 쌓인 눈을 보기 위해 문간까지 나섰던 대원이였다. 햇빛 아래 환하게 펼쳐진 설경으로 뛰어가고 싶은 욕구를 대원이는 또 한번 매몰차게 뿌리쳐야만 했을 것이다.

대원이가 다리를 절기 시작한 건 지난 5월부터였다. 무릎의 통증을 호소하는 대원이를 인근 병원에 데려가 진찰을 받았는데, 단순한 성장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그러나 대원이의 다리는 전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점점 병세가 악화되자 지난 9월경 큰 병원으로 가보라는 권유를 받았고, 그래서 찾아간 ‘서울강남 성신병원’ 소아과에서 무혈성괴사증이란 희귀한 병으로 판명됐다.

“희수가 보고 싶어요”

무혈성괴사증. 뼈에 혈액이 공급되지 않아 뼈가 조금씩 죽어 가는 병이다. 대부분 성장을 멈춘 30~50대에 이르는 젊은층에 많이 발생하는 그 병은 한참 뼈가 자라나고 있는 9살의 키 작은 대원이의 왼쪽 넓적다리뼈를 상하게 했다. 지난 10월18일 전신마치 후 행해진 수술에서 대원이의 왼쪽 넓적다리뼈는 한 뼘 이상 잘려나갔다. 잘려나간 뼈를 대신해 핀이 박아졌고 그 후로 대원이는 집안에 머물러 있어야만 했다.

“수술비는 수원에 계신 대원이 할머니가 극장에서 밥을 해주며 모은 돈으로 충당했어요. 요즘은 집안에서 목발을 짚고 걷는 연습을 하고 있어요. 내년 봄이면 목발을 짚고 학교에 나갈 수 있을 것도 같은데……”

양명순씨는 또래와 어울리지 못하는 아들이 안타깝기만 하다. 대원이는 제일 친한 같은 반 친구 희수를 보고싶다. 소방관이나 안정환 같은 축구선수가 되고 싶다. 그러나 성장이 멈출 때까지 뛰는 걸 조심해야 하는 대원이에게 그건 너무 먼 꿈이다.

대원이는 얘기 중에 소매를 엄마의 얼굴께로 향했다. 엄마의 눈가에 아롱진 눈물을 닦아주기 위해서였다. 동생과 떠들썩하게 놀던 대원이의 얼굴엔 웃음이 가시고 시무룩함이 배어들었다.

몇만원 일당이 더 절실한 성탄절

그러니까 올 5월, 대원이가 다리를 절기 시작했을 때 대원이의 아버지 김종석씨는 일하던 도중 지붕에서 떨어져 허리를 다쳤다. 입원해서 6주의 치료를 마친 후 김씨는 당분간 안정을 취하라는 의사의 권유를 뒤로하고 일용직 근로자로 일에 뛰어들었다. 지금은 서산 인근에서 축사를 짓는 일을 도와주며 하루하루 일당을 벌고 있다. 대원이를 만났던 성탄절에도 김씨는 현장에 나가 일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크리스마스라는 달콤한 하루 보다 몇 만원의 일당이 더 절실했기 때문이었다. 2003년 새해가 밝으면 월세를 올려주어야 하는 상황이지만 지금 하는 일이 마무리돼 새로운 일자리를 찾아봐야 한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김씨는 술을 입에 대는 날이 부쩍 많아졌다. 생활비와 25만원의 월세와 겨울의 찬바람이 그를 괴롭혔을 터였다.

지금은 한 평이 갓 넘는 방에서 네 가족이 함께 생활하고 있지만 대원이에게도 넉넉했던 시절이 있었다. 김씨가 울산에서 직장을 다녔던 그 시절엔 지금보다 좀 더 넓은 집이 있었고 대원이의 다리와 김씨의 허리도 네 가족의 속을 썩이지는 않았다. IMF가 터지면서 김씨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당진에 내려와 알미늄샷시 사업을 구상했다. 네 명이 함께 출자해 동업하기로 했으나 사기를 당해 출자금 2천3백만원을 깡그리 잃었다. 기술을 갖고 사업에 참여했던 대원이의 삼촌도 결국 수원에 있는 집으로 돌아갔고 김씨는 하루하루의 일거리를 찾아다녀야 했다. 부푼 꿈을 안고 온 당진에서 그들은 줄곧 실패와 좌절의 길을 걸어왔던 것이다.

산타는 새 물감을 집어넣었을까?

야무진 연옥이는 엄마가 할 수 없이 집을 비우면 거동이 불편한 오빠에게 밥을 차려준다. 양명순씨가 밖에 나갈 일이 있으면 걱정 말고 다녀오라며 오빠를 돌보는 연옥이다. 유치원생 같지 않은 그 어른스러움이 낯설게 느껴졌던 이유는 무엇일까.

당진읍의 외과도로 변에 위치한 대원이네 집 주변에는 함께 놀 수 있을만한 또래들이 없다. 그래서 대원이와 연옥이는 남매이자 유일한 친구가 된다. 최근엔 푸푸가 낳은 새끼들을 모두 나눠주고 남은 두 마리의 강아지가 남매들에게 웃음을 안겨주고 있다. “오빠 강아지 이름은 ‘나비’구여, 내 강아지는 ‘실버’에요”라고 풋, 웃는 연옥이. 그 곁에 선 대원이의 얼굴은 영 웃음이 지어지질 않았다.

밤은 더 깊어졌고 눈발은 한층 성기어지고 있다. 그들 남매가 옷장에 걸어놓은 양말은 어둠 속에서 알록달록한 빛을 낼 것이다. 산타는 남매의 양말 속에 새 물감을 집어넣었을까? 남매의 산타에 대한 믿음이 오래 지속되길... 대원이의 다리에 다시는 몹쓸 병이 침입하지 않길... 추운 밤이 네 가족의 단잠으로 어서 빨리 지나가길... 작고 소중한 기도를 올린다.

■도움주실 분 - 계좌번호:811-04-307506(조흥은행), 예금주:김종석

이희철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