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동 소설가
새 소설 "찬미가에 싸인 원혼" 발굴돼
‘영화소설 탈춤-심훈 作. 조선서 처음되는 영화소설이 명일부터 게재하게 되었는데 매일 삽화 대신으로 미려한 실연사진이 들어갑니다. 여러분은 기다리십시요.’ 1926년 11월 8일자의 동아일보 예고 기사다. ‘최초’라는 말이 남기는 근대 한국의 풍경은 설명하지 않아도 이해하리라 믿는다.
현재와 같이 신문의 연재소설은 1회에 7장 정도가 삽화와 함께 실리지만 당시는 대체로 원고량이 많거나 삽화의 크기가 독자의 시선을 끌기 위해서 매우 컸다. 읽을거리가 부족했던 그때에는 매신, 조선, 동아, 시대일보만의 신문에다(경성일보는 일어, 서울 프레스는 영어판이었다) 잡지가 갖가지로 홍수처럼 쏟아져 나오던 20~30년대라 경쟁이 심했다.
첫 회부터 ‘영화소설’임을 달고 시작한 “탈춤”은 9일부터 12월 16일까지 34회로 끝나는데 이틀에 한번꼴로 연재가 되고 이때 춘원은 “마의태자”를 연재한다. ‘禁無斷撮影(금무단촬영)’이란 표기로 보아 심훈은 이를 영화로 만들 계획이었던 것 같았고 한 컷씩 들어가는 삽화도 그림이 아닌 실제 실연한 사진을 넣으므로 해서 영화적인 냄새가 짙게 풍겨나고 있다.
그 삽화라는 게 현재의 만화칸 구성처럼 그림 속에 대화체도 끼여 있어서 새 양식을 도입(심훈은 27년 2월 17일, 5월 12일 조선일보에 도일 귀국기사가 나왔는데 영화 “먼동이 틀 때”를 찍을 때도 일본서 배운 새 촬영법을 이용해 흥행에서 성공하게 된다)했고 등장배우는 춘사 나운규, 김정숙, 남궁운, 주인규, 김갑식, 윤정진 등으로 한 회분이 끝나는 끝에 ‘등장인물-배우이름’을 표기한 게 이채롭다.
배우 나운규는 설명을 안해도 우리 영화사에 다 아시리라, 춘사 말이다. (심훈은 25년에 이경손 감독의 영화 “장한몽” 후반부 주인공인 이수일역을 대역하고 소속사인 계림영화협회의 회원이 된다. 이영일의 “한국영화전사”나 안종화의 “한국영화 측면비사”에는 지난 초창기의 영화계 모습이 잘 서술이 돼 있는데, 안씨의 책은 서술 시각에 있어서 객관성 확보가 어느 정도일까 하는 의문을 많이 남긴다) 또 한가지 사실은 작년 12월, 그간 이름만 전해오던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동인지이던 “신청년” 5권이 발굴됐다.(중앙일보 5일자 보도) 소파 방정환이 주도한 이 잡지는 3.1운동이 일어나기 40일전인 1월 20일에 1호가 나온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문예동인지 “창조”보다도 10일이 앞서는 것이다. 우리 문학을 전면 재조명해야 문제로 떠올랐다. 1호~6호(5호는 목차만 확인)까지 나온 것으로 추측되는 동인지에는 만해 한용운의 산문과 심훈, 나도향, 유광열, 박영희, 최승일, 황석우, 현진건, 박종화 등 근대문학 초창기 인물들의 작품이 20여 편 실려 있는 것. 심훈이 동인으로 활동하며 그들과 교우하고 있는 사실이 드러난 일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작가들의 데뷔 소설보다도 앞선 것들이다. “신청년” 3호(20년 8월 1일 발행)에는 심훈의 단편소설 '찬미가(讚美歌)에 싸인 원혼(怨魂)'이 발표돼 있다. 현재 알려진 작품들보다도 앞당겨지는 것이어서 주목할만하고 그만큼 문학세계가 더 확장되는 계기가 될 터이다. 심훈이 남긴 20년 1월 3일부터 4월16일까지의 일기를 더듬어보면 그때의 사회상황과 함께 그의 독서나 방정환과 친밀한 관계, 인촌 김성수씨 집 방문, 집안 일 등과 창작과정을 소상히 적어가고 있다. 가령 소설 ‘生別死別(생별사별)’을 써서 “신청년”에 주고, 작은형이 관계한 동아부인회의 창립취지서를 번역하거나 잡지 ‘근화’에 실을 신체시 ‘새벽빛’을 노영호에게 주며, 이희승에게 한글을 배우고 ‘폐가의 월야’, ‘꽃의 서름’을 쓰고, 일기문 ‘노량진의 겨울’을 써서 방정환에게 건네주는 등 습작에 열성을 다한다. 또 아내와 우미관으로 영화 보러가기, 큰형님 입원한 한양병원 위문, 청년회관에서 신흥우의 연설을 듣는 등등 소소하고도 젊은이의 내밀한 기록이 적혀 있으며 ‘피에 물들인 석양’을 동아일보 창간시에 보냈다든가 ‘찬미가에 싸인 원혼’을 써서 방군(정환)에게 주리라는 3월 16일 기록이 있는데 이는 이번에 발굴된 “신청년” 3호에 나온 것이다. 이 소설은 심훈이 19년 감옥 안에서 서울 천도교대교구장이 돌아갈 때와 그의 임종을 적은 내용으로 ‘3.1운동 전후 시대의식’을 담은 것으로 여겨진다.
한기형 성균관대 교수의 말처럼 ‘신청년’에 대한 심훈의 의식속에 3.1운동을 경험한 국내의 진보적 문학청년들의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는 말은 적절하다. ‘신청년’은 이렇듯 동인지 ‘창조’보다도 앞서서 낭만, 프로문학을 배양 실험했다고 보여지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잡지를 통한 근대기의 우리 민족운동을 놓지 않고 함께 호흡했음을 알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