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민중을 위해 바친 반생, 미국인 신부 서로베르또
불평등에 대한 저항과 가진 것 없는 삶
“평화의 길 비추는 빛으로 편히 가소서”
10년 넘게 살아온 신평면 매산리 낡은 집에 영정 모셔져
당진군 신평면 매산리 새티마을에 가면 아직까지도 아궁이에 땔나무를 지펴 살림을 하고 있는 집이 한 채 있다.
추운 겨울에도 보일러를 놓지 않고 아궁이로 불을 때는 이 집에는 집주인의 온정을 자랑하는 듯 흰 회칠을 한 천정과 처마에 제비집을 지었던 자리 여러개가 남아있다. 부엌의 낡은 가스렌지 위에는 빠진 손잡이 대신 짧은 나무토막을 끼워놓은 주전자가 하나 있다. 누가 봐도 이집의 주인은 단촐하고 가난하게 살았음이 분명하다. 이사를 한 것도 아니련만 방에는 그럴듯한 가구 하나 없다.
이 집은 지난달 29일 세상을 떠난 서로베르또(66세, 로버트 수위니) 신부님의 거처다. 미국인이면서 1988년 농촌 특수사목을 위해 이곳 신평면 매산리로 내려온 서신부는 10년넘게 이 마을에서 농민들과 함께 자연과 생명을 가꾸어왔다. 갖출 것 갖추고 비교적 깨끗하게 정리된 공소사택을 마다하고 마을주민이 소개해주는 빈집을 얻어 생활을 시작한 서신부는 말그대로 가난한 한국의 민중과 가난의 고통을 나누며 자신의 영혼은 무소유의 자유로운 삶을 누렸던 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마을 천주교 공소회장을 지낸 바 있는 정남영씨는 서신부를 이렇게 기억하고 있다.
“그 분은 정말로 검소하고 소탈한 분이셨어요. 셔츠 하나로 겨울에는 소매를 내려입고 여름에는 소매를 걷어입으며 10년 넘게 입으시더라구요. 아침 저녁은 간단하게 요기하고 점심만 상을 차려 제대로 식사를 하셨죠. 저녁은 어떤 집에서 초대를 해도 응하시는 법이 없었어요.”
심지어 서신부는 쌀 한 톨을 버리지 않으려고 쉰 밥도 아랑곳 없이 모두 먹었다고 한다.
정씨를 비롯한 마을주민들에게 그런 신부님의 태도는 처음에 너무 낯설었다. 그러나 차츰 누구에게나 다정하면서도 특히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갖고 대하는 모습을 보며 그 분의 생활 저변에 깔린 철학을 이해할 수 있었다.
서 신부는 또 땅을 밟으며 걷는 것을 좋아했다. 삽교천이나 거산에서 버스를 내리면 한시간이 넘는 거리를 영락없이 걸어서 마을로 들어오곤 하였다. 몇 년전 마을주민 한사람에게서 자전거 한 대를 선물로 받을 때까지 서신부의 걷기는 계속되었다.
땅에 대한 사랑은 당연히 농사일과 유기농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져 서신부는 이곳에서 4년동안 직접 농약과 화학비료를 주지 않고 농사를 짓기도 했다. 농사일을 그만둔 다음에도 다니는 집집마다 농약을 치지 말라고 당부를 했다. 서 신부가 기거하던 방은 낡은 집 왼쪽 모퉁이에 있는 건넌방이었는데 이곳에서 서신부가 가장 좋아했던 것은 쪽문을 통해 들어오는 흙냄새였다고 한다.
서 신부는 정보를 지식으로, 지식을 지혜로 착각하는 요즘에 와서 새롭게 조명받고 있는 자연주의자 가운데 한사람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온몸으로, 생활로 온전히 그것을 실천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1964년 한국땅을 밟으며 시작된 그의 선교활동은 사회, 역사의 정의와 평화를 구현하는 일에 더욱 비중을 두고 있었다.
서신부는 65년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사제활동을 시작해 광주 대건신학교 교수로 잠시 재직한 뒤 한국사회가 민주화의 열병을 앓고 있던 80년대에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연합의 일원으로 우리사회의 정의를 세우는 데 일조햇다.
서신부가 10년 넘게 고락을 같이해온 매산리 이웃들을 떠나 작년 7월부터 최근까지 서울에 머물렀던 것도 미군 국제폭격장문제로 생존의 고통을 안고있는 매향리 주민에 대한 관심 때문이었다. 서신부는 지난해부터 <매향리 미군국제폭격장 폐지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 designtimesp=3416>고문을 맡고 있었다. 서 신부는 지난 6월 매향리 관련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 나는 신부로서, 크리스찬의 한 사람으로서 사람과 자연을 파괴하고 괴롭히는 것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이곳에 왔습니다. 미국이 자신의 기득권을 위해 한국사람을 괴롭히고 때리고 죽이고 있어요. 이건 말도 안됩니다. 이 모든 것이 미공군의 이름으로 경영하는 <록히드 마틴 designtimesp=3418>의 프로그램입니다. 그들은 F-16, 스텔스폭격기 등의 값을 올리기 위해 미국의 양당에 정치자금을 주면서 로비를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곳 매향리에 폭격장이 필요하게 된 것이죠. "
이어서 서 신부는 “미국정부는 한국에 있는 미공군 사격장을 즉각 폐쇄해야 하고 SOFA(미주둔군지위협정)도 한국인이 원하는 대로 개정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서 신부는 사격장 폐지와 SOFA개정시위를 진압하기 위해 나선 한국의 경찰들에게도 “한국사람들이 어째서 한국인의 정당한 권리주장을 막느냐”고 하소연했다.
서 신부는 29일 새벽 0시 30분 강남성모병원에서 직장암 수술도 못해본 채 눈을 감으면서도 “매향리는 어떻게 되었느냐”고 마지막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태어나 그 나라에서 교육과 사제서품을 받은 신부. 그러나 자신의 모국이 약국 한국에서 저지르는 역사적인 만행에 <양키 고 홈 designtimesp=3423>을 외쳐야 했던 신부.
서 신부의 검소하다 못해 가난한 생활은 물질과 소유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겠지만 해방 후 미군정기를 거치며 이땅에 자리잡은 새로운 식민구조와 그것을 강요하는 모국의 권력에 대해 온몸과 양심을 던져 침묵으로 저항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7월31일 <민중의 벗, 서로벨또 신부 추도위원회 designtimesp=3426>가 가진 추도식에서 참석자들은 이런 말로 서신부의 가는길을 축복했다.
<믿음따라 삶따라 정의와 사랑으로 이땅의 민중과 함께 하셨던 신부님, 우리들의 신부님, 평화의 길 훤히 비추는 큰 빛으로 평안히 가소서 designtimesp=3428>.
그리고 신평면 매산리 작은 집에는 살았을 적의 소박함 그대로 앉은뱅이 상위에 그분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김태숙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