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정치권은 물론 사회적으로 국가보안법 개·폐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국론분열과 함께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국가보안법은 1948년 12월에 법률로 공포된 바 “국가의 안전을 위태롭게 하는 반국가 활동을 규제함으로써 국가의 안전과 국민의 생존 및 자유를 확보한다”는 제정의 취지와 함께 한국의 반공 이데올로기를 실현하는 장치로써의 핵심적 기능을 담당해왔다.
문제는 이러한 법을 독재정권의 유지·연장 차원에서 악용됨으로써 수많은 정적과 애꿎은 국민의 인권이 유린되고 희생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21세기를 사는 우리에게 있어 이제 이 법의 존폐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할 시점에 와있다고 본다.
이 법으로 인해 집권세력을 반대하는 수많은 정적들이 희생되었다. 그중에서도 ‘진보당사건’과 ‘인혁당사건’은 이 법을 악용한 대표적인 사례라 할 것이다.
진보당사건은 많은 이들에게 이승만 정권시대에 정치발전의 시계를 거꾸로 돌린 상징적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1956년 5월15일 제3대 정·부통령선거에서 창당한지 불과 1년밖에 안된 진보당과 당수 조봉암은 216만표를 얻어 전국민의 광위범한 지지를 얻는 정치세력으로 부상하였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958년 1월11일 밤 경찰은 돌연 진보당 당수 조봉암을 비롯한 간부 윤길중·박기출·이명하씨 등 9명을 국가보안법 위반·간첩죄·간첩방조죄 등을 뒤집어 씌워 구속하고 2차로 14명을 추가기소하는 한편 재판도 받기 전인 그해 2월25일에 정당등록을 취소했다. 이어 다음해 대법원 확정판결에서 조봉암·양이섭씨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피고들의 재심청구를 기각해 버린 후 7월31일 서대문형무소에서 비밀리에 사형을 집행했다.
이는 국민적 지지를 받은 혁신정당 진보당에 대한 이승만정권의 소아병적 경계심리가 ‘국가보안법’이라는 칼날로 실체화된 정치적 무리수였다.
박정희 독재체제의 전반기는 국가보안법과 반공법의 시대요, 후반기는 유신치하의 긴급조치 시대였다.
후반기에도 긴급조치법으로 억누르기에 무리이거나 빨갱이 컴플렉스로 위압하지 않으면 안될 때 또는 조작에 대한 의혹을 더 이상 숨길 수 없어 곤란할 때면 국가보안법은 여지없이 그 정체를 드러내곤 했다.
1974년 신직수 중정부장의 발표로 세상에 알려진 인혁당 사건은 1천24명이 연루되어 253명이 구속되고 180여명이 긴급조치4호, 국가보안법. 내란예비음모 등의 죄명으로 비상보통군법회의에 기소되어 세상을 들끓게 했다. 더욱이 정권은 도예종·서도원·이수병·김용원씨 등 8명이 사형확정 판결을 받고 재판이 종료된지 하루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기습적으로 사형을 집행해 충격을 줬다.
시신6구는 이틀에 걸처 가족에 인도됐지만 2구는 가족의 동의없이 화장을 해버려 심한 고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한 고육책이었음을 인지할 수 있었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국제법학자협회는 1975년 4월8일을 ‘사법사상 암흑의 날’로 선포해 국제적으로 한국이 인권말살 국가란 망신을 당했다.
위에서 살펴본 일련의 사건들은 빙산에 일각으로 국보법에 의한 희생자와 가족들은 지금도 명예회복이 안된 채 한많은 세상을 살고 있다.
UN 등 국제사회와 미국에서조차 이 악법의 폐지를 권고하고 있음에도 마치 이 법을 폐지하면 세상이 뒤집어지는 양 호들갑을 떠는 부류는 지난날의 치부가 드러날 것이 염려되어 모든 것을 걸고 반대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국보법을 폐지하여 문제될 수 있는 법의 약간의 공백문제는 형법개정을 통해 충분히 보완할 수 있을 것이다. 인권이 존중받고 권익이 보호되는 세상을 만들어나가는데 모두가 동참하는 것이 시대적 흐름이자 현시대를 사는 우리의 사명임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