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향땅 밟지 못한 채 당진서 외로운 노후 보내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가 성노예의 고통을 강요받은 후 귀국해 평생을 외롭게 살아왔던 신경란(85, 송악면 오곡리, 본보 188호, 1997년 8월 25일자 보도) 할머니가 지난달 25일 지병으로 별세했다. 지난 1921년 경북 고령에서 태어난 신경란 할머니는 열 여덟살이었던 1938년 간호부를 모집한다는 공고를 보고 일본군을 따라 나섰다가 중국 항주로 끌려가 위안부의 생을 강요받았다. 지난 1993년 정부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등록되어 지금까지 살아왔으며, 그 후 송악면 오곡리에 거처를 마련하고, 강아지들을 자식삼아 홀로 살아왔다.
평생을 외롭게 살아온 신경란 할머니
일본의 망언이 온 국민의 분노를 이끌어내고 있는 요즘 신 할머니의 사망소식은 치욕의 일제 식민역사를 되돌아보게 한다.
꽃다운 열일곱살. 간호부 모집공고를 보고 아무 의심없이 일본군을 따라 나섰다가 위안부 생활을 강요당했던 신 할머니는 중국 항주와 가흥, 안경, 남경 등을 전전하며 고통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러던 중 신 할머니를 좋게 본 일본군 장교들을 설득해 귀국할 수 있었다. 그때가 1938년. 자신과 같이 끌려갔던 위안부 5명과 함께였다.
그러나 귀국했어도 신 할머니는 갈 곳이 많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얼마 있지 못하고 나왔다. 아무래도 주변에서 보는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듯, 스스로 집을 나온 것이다. 신 할머니는 그 후로 평생 고향땅을 밟아보지 못했다.
당진에 정착해서 지금까지
고향을 나와서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며 장사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 정착한 곳이 충남 당진이었다. 서른을 넘기면서 정착할 곳을 찾던 신 할머니는 당시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김모(1981년 사별)씨와 함께 살게 됐다. 당시 김씨는 본부인과 아들과 딸을 두고 있었다.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김씨는 당시 방앗간도 같이 운영했다고 한다.
신 할머니는 김씨와 사별한 후 김씨가 넘겨준 방앗간을 운영하며 살았는데 그마저도 고용인에게 사기를 당해 잃고 말았다.
일본군 위안부 신고로 정부 보상받아
방앗간을 잃고 난 후 신 할머니는 경제적으로 무척 어려운 삶을 지낼 수밖에 없었다. 생활보호 대상자로 매달 나오는 몇십만원의 돈이 수입의 전부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렵게 살면서 어느날 우연히 TV에서 일본군 위안부 이야기를 보고 면사무소에 피해자 신고를 했다. 그때가 1993년. 그리고 정부의 보상방침이 정해지면서 일시 보상금과 매달 일정한 보상금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때가 1999년쯤 됐다고 한다.
떠나는 길은 외롭지 않길...
신 할머니는 사람 대신 개들을 기르기 시작했다. 새로 지은 집에 10여마리의 개들과 같이 살면서 잘 때는 개들을 껴안고 자기도 했다.
경제적으로 여유는 생겼지만 외로운 것은 마찬가지였던 듯했다. 신 할머니는 자신이 어려울 때는 돌아보지도 않다가 돈이 생기자 자기에게 접근하는 사람들에게 배신감을 많이 느낀 듯했다.
보상을 받기 시작할 무렵 신 할머니는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특히 신장이 안좋아져 점점 건강은 나빠졌고 2년 전에는 신장 수술을 받기도 했다. 결국 신 할머니는 세상을 뜨기 몇주전 당진 백병원 중환자실에 입원했고 지난달 25일 새벽 4시30분경 중환자실에서 삶의 두루마리를 접었다.
신경란 할머니는 세상을 뜬 후 곧바로 중앙장례식장에서 장례를 치르고 화장 후 천안에 안장될 예정이었으나 경북 고령에서 온 유족들의 뜻에 따라 고향의 선산에 묻혔다.
※참고:『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군위안부5』, 한국정신대연구소, 2001
※본보 188호, 1997년 8월 25일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