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 산지 30여년만에 집 한채 장만한 박영진·이재순 부부. 아내는 장애 3급의 몸으로 온갖 궂은 일들을 해왔다.
▲ 함께 산지 30여년만에 집 한채 장만한 박영진·이재순 부부. 아내는 장애 3급의 몸으로 온갖 궂은 일들을 해왔다.

시아버님의 제삿날이었다. 제수를 살 돈이 없었던 아내는 이웃집에서 얻은 강아지 한 마리를 판 돈 3천원으로 간신히 쌀과 조기 한 마리를 샀다. 집에 돌아와 제사상을 차리고 보니 음복할 술이 없었다. 술 대신 냉수 한 사발 떠다 놓고 절을 올리는 남편 뒤에 서서 아내는 통곡을 했다. 돌아가신 시아버님께 술 한잔 못 올리는 처지가 너무나 한심하고 죄스러워서 였다. 산 사람 입에도 풀칠하기도 어려운 마당에 죽은 사람에게 술 한잔 못올린다고 나무랄 사람이 있을까. 그럼에도 아내는 그날 일이 한으로 남아 아직도 못 잊고 있다.

장애인 아내의 두둑한 배포와 지혜

그렇게 어렵게 살았던 박영진(57)·이재순(60)씨 부부는 결혼한 지 34년만인 지난 2002년, 마침내 집다운 집을 한 채 장만했다. 물론 아직 갚아야 할 빚이 남아있긴 하지만  단돈 500만원으로 시작한 살림이 번듯한 단독주택을 장만할 수 있을 만큼 불어나기까지는 비상한 두뇌와 배포 큰 아내 이재순씨의 힘이 컸다.

물론 남편의 역할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당진낙협에서 수유작업원으로 일하는 남편 박영진씨는 개미처럼 일만 하는 사람이다. 젊었을적 한곳에서 진득하게 버티지 못하고 이 직장 저 직장 옮겨다니면서 무기력하게 보낸 세월을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하루는 일로 시작해 일로 끝난다. 박씨는 하루 3만원도 안되는 숙직 수당을 받기위해 남들이 반납하는 숙직당번을 도맡아 하는 바람에 한달에 보름은 사무실에서 밤을 보내고 있다.

이웃의 말을 빌자면 아내 이씨는 요모조모 궁리하면서 재산불리기 작전을 짜는 참모이고 남편 박씨는 오로지 아내가 세운 계획을 이루기 위해 열심히 일하는 기계다.

삯빨래와 곤달걀 장사, 연탄배달까지...

안해본 일 없게 만든 ‘가난’이라는 이름

이들 부부가 살아온 세월의 이름은 ‘가난’이었다. 그리고 가난은 이들 부부를 전천후 직업인으로 만들었다. 세 살때 그네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척추장애를 입게 된 아내 이씨는 그 굽은 허리로 삯빨래는 물론 애기돌보기, 곤달걀 장사, 연탄장사, 보험일까지 안해 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을 했다. 어머니의 과잉 보호속에 자란 탓에 마흔이 다되도록 변변한 직장 하나 못 잡고 이일 저일 전전하던 남편 덕분(?)이었다. 들어갈 살 형편이 안될 정도로 가난했던 6남매 집안의 맏며느리로서 시동생과 시누이들을 건사해야 했고 조카들까지 이씨의 손에서 자랐다. 그 와중에서도 남매를 낳아 키웠다.

하루 밥벌이도 힘든 상황에서 이들 부부가 땅 220평을 장만한 건 순전히 아내 이씨의 지혜덕분이었다.

남의 집살이로는 절대 재산을 불릴 수 없을 것으로 믿었던 아내는 세들어 살던 집이 철거되면서 받은 보상금 500만원으로 누구도 거들떠 보지 않던 당진읍 백암리의 야산 불모지를 사들이기로 결정했다. 땅값은 1000만원. ‘그런 땅을 왜 사느냐’는 주변의 만류도 아랑곳 하지 않았다. 부족한 500만원을 어떻게 마련하느냐가 문제였는데 이씨는 땅주인과 계약금 500만원만 건네면 일단 명의이전을 해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보고 땅을 담보로 은행융자를 얻어 부족한 돈을 마련했다. 불모지였던 야산을 밀어 대지로 만들고 나니 더없이 좋은 집터였다. 그곳에 이들 부부는 보금자리를 꾸몄다. 대충 기둥을 세우고 축사에서 쓰는 보온 덮개로 지붕을 올리고 비닐천막으로 벽을 대신했다. 여름엔 찜통, 겨울엔 냉장고 같았던 천막집에서 20여년을 살았다. 허술하기 그지 없는 집이었지만 “내 땅에 지은 내 집이었기에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다”고 아내 이씨는 말한다. 집주변 축사에서 남의 소를 키워 간신히 빚을 갚았고 그렇게 마련했던 땅은 전원주택부지로 9천만원에 팔렸다.

착한 사람들에게 내린 복덩이

쌍둥이 송아지

아내는 그 돈으로 깔끔한 아파트 한 채가 아닌 축사부지가 있는 단독주택을 사들였다. 노후에 두 노인네가 살 수 있으려면 가축이라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순성면 갈산리, 지금 살고 있는 집을 사게 된 것이다. 소를 키우겠다고 맘먹고 장만한 집이었지만 정작 송아지를 사들일 돈이 없었다. 엄청난 액수로만 여겨졌던 땅 판 돈은  여기저기 떼어주고 나니 남는 게 별로 없어 집마저 융자를 떠안고 사야했다. 이들 부부의 처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한 이웃이 밑천으로 삼으라며 500만원을 빌려주었다. 부부는 그 돈으로 임신한 소 한 마리를 샀고 그 암소는 어느날 아침, 고맙게도 쌍둥이를 낳아주었다. 송아지를 팔아 빚을 갚았고 남편 박씨의 퇴직금을 담보로 소 세 마리를 또 들였다. 이 소값은 올해 10월 곗돈을 타서 갚을 작정이다.

아무것도 없이 3급 장애의 몸으로 꾸려온 살림이 오죽했을까마는 아내 이씨는 남 어려운 사정을 그냥 흘려버리지 못하는 따뜻한 심성을 갖고 있다.

품안에 들어온 아이 버리지 못한 사연

방이 여러칸이던 삭월세 집에서 살 때였다. 월세라도 건져보자고 아들녀석의 친구들에게 월 2만원에 방을 내 주었다. 그런데 녀석들이 반찬도 없이 맨밥을 먹는 것을 보고는 안타까워 쌀만 가져오라고 해 직접 밥상을 차려주었다. 새벽같이 일어나 도시락 일곱 개를 쌌던때가 바로 그때였다.

“다른 이유가 뭐 있겄어, 내 자식이나 한가지니께 그랬지”

정은이(가명)를 맡아 키우게 된 것도 품에 들어온 아이를 내칠 수 없었던 이씨의 여린 심성때문이었다.

푼돈을 받으면서 남의 아기를 돌봐주는 일을 했던 이씨는 어느날 남편 박씨가 데려온 갓난아기를 맡게됐다. 남편과의 불화로 아이를 낳아놓고 어미가 집을 나가버리는 바람에 당장 젖먹일 일이 걱정인 백일이 갓 지난 아기였다. 제대로 먹이지 않아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야윈 그 아기를 주위 사람들은 행여 잘못되면 어떡하냐며 맡지 말라고 말렸다. 그러나 이씨는 차마 그럴 수 없었다. 아이의 아빠가 주는 몇푼의 양육비가 탐나서가 아니었다. 자신의 손을 떠나면 살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쌀가루를 갈아서 암죽을 끓여 먹이고 감 배 사과같은 것을 수저로 긁어 먹이길 수개월, 아이의 얼굴이 뽀얗게 피면서 살이 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가 네 살이 되던 해 양육비가 끊겼다. 아이의 할머니가 자신이 직접 아이를 키우겠다고 찾아왔다. 그러나 들리는 소문에 아이의 할머니는 아이를 절에 보낼 작정이었다.

“그래 돈 필요 없으니 내가 키우겠다고 했지. 돈은 나중에 생각나면 달라고 했구. 애가 네 살밖에 안됐는데두 지 할머닐 따르지 않더라구”

아이는 그때부터 이씨의 막내딸로 살게됐다. 그리고 이씨는 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때 사실을 모두 말해주었다. 여덟살배기 꼬마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큰 충격이었지만 친할머니가 가까이 살고 있는 상황에선 언제 알아도 알게 될 사연이었다. 더욱이 아이는 친할머니쪽에서 동의를 해주지 않아 호적도 옮기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다. 다행히 아이는 잘 자라 주었다. 아직도 이씨의 젖가슴을 더듬는 철부지이지만 간혹 학교에서 전활걸어 ‘혼자있다고 밥굶지 말고 끼니 챙겨드시라’고 말하는 애어른이기도 하다.

“내 뱃속으로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한번도 넘이라구 생각한 적 읍어. 애 아버지가 싫다고 했으면 못키웠을텐디 싫은 내색 안하구 한결같이 대했지.”

아내 이씨에겐 마냥 ‘착한 남편’인 박씨다. 머지 않아 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될 정은이가 이 부부는 이제 걱정이다. 장애인인 아내 이씨의 호적에 올리면 여러 가지 혜택을 받게 돼 교육비 부담이 많이 줄어들 터인데 그러질 못하고 있는 처지가 답답할 뿐이다. 정은이가 그토록 배우고 싶어하는 피아노도 못 가르치는 형편이 이씨는 가슴 아프다. 시아버님 제사상에 술 한잔 못올린 그옛날 그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