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으로 유명한 조지 A. 로메로의 <브루져(Bruiser)>는 헨리라는 한 소심한 인물의 잔인한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잔인한 행위를 실천하는 인물이 난폭한 사람(Bruiser)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그가 저지른 살인 행위는 그 자체로 잔인하지만 그는 도시에 사는 우리의 얼굴과 너무 닮아서 인지 결코 잔인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누구나 상황에 맞는 가면을 쓰기 마련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에 그 가면은 내 새로운 얼굴이 되어 버린다. 그 때가 되면 가면을 쓴 얼굴을 매일 아침, 거울을 통해 바라보면서도 전혀 그 가면을 의식하지 못하게 되기에까지 이른다. 그리고 북적거리는 도시를 떠도는 무수한 이질적인 얼굴들 속에 묻혀 버리고 만다. 사실, 그 무수한 이질적인 얼굴들이 나의 아이덴티티의 일부인지도 모르는데...
한편, 헨리의 잔혹함이 아르또가 말하듯 "엄격함, 즉,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나 적용, 거역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확고한 태도"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러기에는 그는 너무 수줍은 성격이기 때문이다.
헨리는 소심한 성격의 샐러리맨이다. 그는 사장의 공세에 아무 반박도 하지 못하며 사장과 대놓고 바람피는 아내를 숨어서 지켜보는 사내다. 그리고 자신의 돈을 빼돌리는 친구에게 속아 가며 그를 자신의 절친한 죽마고우로 생각한다.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 앞에서는 제대로 말문을 열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그는 일상적인 반복적인 생활과 자신의 소심한 성격에서 오는 고통을 소극적인 방어기제로 그럭저럭 이겨낸다. 엽기적인 상상으로 자신의 소심함을 보상하려는 것이었다. 자신의 턱 밑에 권총을 대고 방아쇠를 당긴다거나, 통근열차에서 자신을 밀치는 여자의 머리를 기차바퀴 아래에 밀어 넣는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아내와 사장 그리고 좋아하는 여인 앞에서 소심할뿐 속마음을 내놓지 못한다.
그런데 어느 날 이상한 일이 일어난다. 잠에서 깨어났을 때, 얼굴에 하얀 페인트가 칠해진 마스크가 씌어져 있다. 그것은 벗겨지지도 않고 닦여지지도 않은 채 피부에 꿰 매져 있다. 자신의 소심한 얼굴이 가려진 것이다.
이 때부터 그의 숨겨진 잔혹한 얼굴이 고개를 내민다. 자신 본래의 얼굴을 하얀 마스크가 완전히 가려버렸기에 숨어있는 잔혹한 일면을 드러낼 수 있었던 것일까? 그 본래의 얼굴이 잔인한 것인지, 소심한 것인지는 몰라도 말이다.
어쨌거나 그의 드러난 일면만 보면 가면 뒤에 자신의 소심함을 숨기고서야 분노를 표출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헨리는 처음으로 가정부를 살해한다. 그리고 사장과 정사를 벌이고 있는 아내를, 자신의 돈을 빼돌리는 친구를, 속물인 사장을 차례로 죽여버린다. 하지만 사실, 헨리는 마스크를 쓰고 잔혹한 살인을 일삼지만 언제나 망설이고 불안해하며 소심함을 떨쳐 버리지 못한다. 소심한 얼굴은 여전히 꿰매어진 가면 위로 스며 나오고 있는 것이다. 사실 그의 자아는 가면을 쓰던지, 아니든지 분열되어 갈팡질팡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축제 중에 사장을 죽인 이후 가면은 사라지고 본래의 얼굴로 돌아온다. 더 이상 죽일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이제, 헨리는 어딘 가에서 문서전달을 하는 일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사장이 그에게 욕을 퍼붓는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헨리의 얼굴에는 사라졌던 하얀 마스크가....
영화 속의 헨리처럼 결코 극단적인 면모를 보이지는 않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우리 역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종종 그 가면을 쓰고도 헨리와 같이 소심함을 떨쳐 버리지 못하고 환상으로 그것을 보상하려 한다. 영화 스크린의 정지된 이미지와 같은 환상 속에 거세된 자존을 교묘히 숨기는 방식으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