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교수들이 연말이 되면 한해를 정리하는 사자성어(四字成語)를 선정하고는 하는데 올해는 밀운비우(密雲非雨)란 말을 뽑았다고 한다.
구름은 짙게 끼었는데 비는 오지 않는다는 뜻이다.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모르는 형국으로도 풀이한다.
마주 오는 열차와 같이 대립과 대결로 치닫고 있는 각박하기만 한 세태를 보면서 우리사회는 중재자도 없고 관절도 없고 자동차 범퍼도 없는 형국이란 생각을 하고는 한다.?
내가 겪은 각박한 세태 얘기다.
한 친목 모임에 참석하려고 주차하다 생긴 일이다. 옆 차와의 거리가 좀 좁았는데 뒷자리에 탔던 5살배기 손자가 승용차 문을 열다가 옆 차와 가볍게 부딪쳤다. 받친 차의 주인 부부는 같은 모임의 멤버이고 아내와는 각별한 사이였다. 내리며 살펴보았지만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어서 그냥 지나쳤다.
그런데 그게 문제가 된 것이다. 며칠 후에 그 모임을 주도했던 친구로부터 황당한 얘기를 들었다. 받친 차 주인은 차를 무지 아끼는 성품인데 차가 받힌 사실을 알고는 무척 화가 나서 모임에도 불참하려고 한다는 얘기였다.
그 사실을 전하는 친구의 표정이 하도 진지하고 엄숙해서 마치 뺑소니 사고라도 친 것 같은 분위기였다. 서울의 아는 카센터에서?견적을 뽑았는데 십 만원이 훨씬 넘었다는 것이었다.
피해 차의 상태를 살펴 본 이들은 모기 눈만큼 흠이 생겼다고 했지만 어찌 됐건 내 손자가 차문을 열다가 생긴 일이고 모기 눈이건 아메바 눈이건 차에 흠집이 생긴 것은 사실이기에 견적에 나왔다는 수리비를 주었다. 기분이 상큼하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수리비를 주고받을 사이는 아니었는데라는 생각도 들었고 수리비를 건네면 사양할 테지 하는 생각도 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그 친구에 대한 생각이 달라졌다. “자식! 좀팽이로군. 더불어 지낼 그릇이 못 되는 군!”하고..
만날 계제가 되면 자리를 피했고 종내는 내 스스로 그 모임에도 참가하지 않게 되었다.
아내가 그러지 말고 괜찮은 사람들이니 화를 풀고 그전의 관계를 회복하자고 해도 막무가내로 도리질을 쳤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가 속 좁은 사람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돌려 생각을 해보니 나한테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차가 부딪쳤으면 자세히 보고 상대와 구체적인 얘기를 나눴어야지 내 생각만으로 쉽게 재단해버린 것은 독단에 다름이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모기 눈이건 송사리 똥이건 흠집이 생겼으면 견적을 받아 보라고 먼저 얘기를 했어야 했다는 생각도 하게 됐다.
그런 생각이 들면서 아내의 말을 듣기로 하고 그 친구부부와 식사도 함께하고 집을 찾아가기도 하는 관계는 회복하게 되었다. 깨어진 그릇이라고 하든가, 그래도 그전 같이 흉허물 없는 관계로의 회귀는 쉬울 것 같지가 않다.
이번에는 다른 얘기들이다.
그 일을 치른 후에 나는 젊은 시절 함께 일했던 한 친구를 생각하곤 한다. 그 친구는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대거나 길가에 주차하다가 앞차와의 공간이 애매하면 사정없이 범퍼로 밀어 차 댈 자리를 만들고는 했었다. 그러면서 “범퍼는 보기 좋으라고 달고 다니는 게 아니거든.” 하고는 했었다.
영국에서 공부하고 돌아온 그는 꽤 통이 큰 친구였다. 일도 화끈하게 하고 잦은 회식 자리에서도 통 크게 폭탄주를 쏘고는 했던 친구다.
승진도 빨랐고 큰 인물이 되리라는 기대가 컸는데 비행기 사고로 애석하게 한창 나이에 타계했다. 아직도 자동차 범퍼를 보면 통이 크고 가슴이 따뜻했던 친구의 생전 모습이 떠오른다.
중국의 베이징을 여행할 때의 일이다. 출근길 자금성 앞에서 자전거를 타고 가던 젊은 여성이 택시와 부딪쳐 넘어지는 장면을 목격했다.
추리닝 차림의 그 여성은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자전거를 세우고 이리저리 살펴 본 뒤에 씩 웃으며 택시 운전사에게 손을 들어 그냥가라는 신호를 보내는 것이었다. 그리고 자전거의 행렬은 다시 평소의 모습 그대로였다. 순간 저런 일이 서울에서 벌어졌으면 어땠을 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의 범퍼가 있는 까닭은 부딪침에 대비하기 위한 것일 게다. 긴 다리나 높은 빌딩에는 흔들림을 받아들이는 충격 완화 장치가 필요하고 우리 몸에 관절이 있는 것도 같은 이치일 터.
웬만하면 받아들이고 서로를 이해하는 사회, 밀운비우(密雲非雨) 아니라 모든 일이 예측 가능한 나라를 만들어 갔으면 한다.
자동차 범퍼가 제 몫을 하고 중도가 관절 역할을 하며 원로가 제구실을 해서 편안한 새해가 되기를 기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