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은 기술자가 CEO는 될 수 없다고 했지만 난 해봤지.

기술자라도 목표를 가지고 주도적으로 상황을

바꿔나가면 되거든”

“내정신의 바탕은

4H와 당진상록학원,

참되고 배우고

그리고 일하는 거지”

일상의 자취를 더듬어보면 변화의 역사가 있다. 그리고 변화는 어느새 덤덤한 일상이 되어있다. 이제는 잊혀진 110볼트 시대. 1980년대와 90년대를 거친 후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220볼트 시대에 살게 되었다. 우리는 이 변화의 배경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1973년 우리나라는 전력수급 문제로 한국전력은 물론 온 나라가 고민에 빠졌다. 경제성장율과 GDP(국내 총생산)가 매년 10% 이상 성장하면서 매일 새로운 공장들이 설립됐지만 전력수급이 이를 따르지 못했던 것이다. 제한송전도 해보고 심야전기 사용권고 정책도 폈지만 전력공급은 수요를 따르지 못했다. 결국 정부는 한전과 학계, 기업들을 총동원해 대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논의 끝에 AID차관 도입 등 발전소 증설대책은 나왔지만 문제는 생산지에서 가정이나 공장까지 어떻게 전기를 공급하고 그 엄청난 설비증설을 어떻게 감당할 것인가였다. 숱한 토의 끝에 나온 결론은 승압이었다. 전압을 두배로 높여 공급한다는 것인데 이미 설치된 송배전 전선굵기로 승압만 한다면 손 하나 안대고 2배의 전력을 공급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일각에서는 위험하다고 펄쩍 뛰었지만 1973년 10월에 시작된 승압공사는 2005년 11월 실로 32년만에 전국에 걸쳐 완료되었다. 당초 20년을 목표로 시작된 데 비하면 10여년이 늦었지만 한전은 이 사업에 1조4천억원을 투입하여 3조4천억원의 가치를 올렸으며 투입된 연인원은 757만명, 220볼트 수용가는 1753만 가구, 전력손실감소량은 연간 40억kwh로 매년 1700억원씩을 벌어들이는 셈이라고 발표했다.

1970년대 이 전기혁신의 주역들 속에 김재길씨가 있었다. 당시 30대의 나이로 전선과 트랜스를 제조하는 모 중소기업에 근무하며 늘 혁신적인 아이디어와 과감한 업무개혁으로 관습 대신 효율을 중시하는 회사분위기 조성에 앞장서온 김씨는 제조업체를 대표해 이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있었다. 우리가 일명 ‘트랜스’라 부르는 가정용 소형 전압조정기의 국가규격을 입안한 당사자가 바로 김씨였으며 김씨의 제안은 바로 국가규격으로서 제정공포되었다. 또한 김씨는 전문 전기기술자로서 직접 현장지도를 하며 우리나라 가정용 전압을 110볼트에서 220볼트로 승압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당진읍 용연리의 조용한 골목 안에 김재길(70)씨 부부가 사는 집이 있다. ‘전기쟁이’로서 평생을 엔지니어로 살면서도 기술자에 머물지 않고 공장장, 전무이사, 부사장까지 지내며 CEO로서의 면모도 유감없이 발휘해온 그는 고희(古稀)를 2년 앞둔 2005년 용연리로 낙향했다.

“열다섯 살에 쌀 두말 짊어지고 인천사범 간다고 집을 떠났으니 50여년만의 일이지. 결국 낙방하는 바람에 인천공고로 진학했고 그 뒤로 평생을 전기쟁이로 살게 됐지.”

낙향 후에는 회사생활을 하며 직원교육용으로 정리했던 글들과 자녀들을 위해 정성껏 써온 글들을 모아 고희기념 문집을 발간했다. <70고개에서 본 세상을 자녀들에게>라는 제목의 문집에는 자기관리와 가정운영, 경영마인드, 혁신과 도전, 취미와 꿈, 미래의 비전 등 50여년간 기술자로서, 경영자로서 폭넓게 살았던 사회생활의 경험과 의지들이 꼼꼼한 자료들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다.

늘 혁신과 도전을 감행하지만 본인이 나서기보다 타인의 성장을 지원하는 조력자로서의 위치에 중심을 두고 살아온 사람답게 집도 주변경관과 불협화음이 생기지 않도록 애써 소담하고 작게 지었다. 집 뒤로는 작은 텃밭을 만들어 상추, 고추도 심어 가꾸고 토끼와 닭들도 키우고 있다. 몇 년 전 뇌경색을 심하게 앓던 아내도 이곳에 오고부터는 건강을 많이 회복했다. 사실 고향에 오게 된 것도 아픈 아내 덕이었다.

고향에 내려와 바빠진 일이 하나 있다. 사단법인 심훈상록수기념사업회의 사무총장을 맡은 것이다. 지난 2년간 사실상 서무와 법인설립에 관한 모든 뒤처리를 해왔다. 정작 낙향할 때 작심을 한 일이 아니었지만 50년전 4H동지이자 상록학원 동지인 김형환 회장의 청을 거절할 수 없어 시작한 게 젊은 시절 못지않게 바빠진 이유가 됐다. 억지로 떠맡긴 했지만 그저 어거지만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의 마음 밑바닥에도 젊은 시절 농업과 생활개선에 앞장섰던 4H정신과 자조 자립의 상록학원 설립정신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상록학원은 1950년대말과 1960년대초에 충남도 4H연합회를 이끌던 당진인물들과 기독교, 기타 사회단체들과의 연대로 강연회, 강습회 등을 통해 고장의 청소년지도자를 양성한다는 목적으로 설립된 당진의 자생교육기관이었다. 김재길씨는 고등학교 졸업 후 당진에 내려와 이 상록학원의 설립에 참여했으며 학생 겸 교무로서 활동한 경험이 있었다. 그의 마음과 생각 속에는 참됨과 배움과 일함에 대한 변치않는 열정과 충심이 숨어있다.

“젊은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부디 자기일에 충실하세요. 그러면 일부러 돈을 쫓아다니지 않아도 필요한 만큼은 생겨요. 그리고 가정에 충실하세요. 남편일, 아내일이 어디 따로 있나요? 함께 하세요. 마지막으로 공부 좀 하세요. 학생 때 조금 배운 거 가지고 어떻게 평생 변하는 시대에 우려먹을 수 있겠어요. 평생 책을 놓지말고 끝없이 배우고 또 배우세요. 그러면 삶이 풍족해질 거예요.”

글_사김태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