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가 중시되고 있다. 탈산업주의로 시작한 21세기, 세계는 문화를 중시하고 있다. 산업주의에 대신해 문화·정보주의가 새로운 성장 기반으로 떠오르고 있으며, 외부로 확장하던 도시 또한 복원과 재생, 미관화하는 새로운 성장 방식을 선호하고 있다. 이미 낙후된 공장지대나 도심을 문화지대로 조성한 1970년대 유럽과 북미의 모델은 오히려 낡은 예다. 지금은 대부분의 도시가 어떻게 하면 도시를 미관화하고 주민들에게 더 나은 삶을 불어넣어줄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다.
우리 또한 예외는 아니다. 과거 예술가 복지를 고민한 ‘복지형 지원정책’은 예술교육과 공공예술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다. 단순히 돈을 주는 건 더 이상 정책이 아니다. 예술가로 하여금 주민에게 더 많은 서비스를 제공하며, 공공의 영역에 더 많은 예술가가 결합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정책의 핵심이다. 우리 당진군에서 진행하고 있는 ‘문화예술학교’의 설립이나 여러 곳에서 펼쳐지고 있는 문화중심도시의 추진 등은 아직은 영글지 않았지만, 분명 미래의 방향을 보여주는 새로운 실험지다. 그렇다면 왜, 어떻게 중시되는 것일까?
도시에서 문화가 중시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그 중 가장 큰 이유는 직접적이고 확실한 ‘관광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알다시피 뉴욕의 브로드웨이는 연 100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고 한다. 스페인 빌바오 또한 구겐하임 미술관 하나로 한달 평균 11만 3000명의 관광객을 유치한다고 한다. 이는 미술관이 없었을 당시보다 무려 34.6% 늘어난 수치다. 미술관 하나를 개관함으로써 바스크 분리주의자들의 테러도시로 악명 높았던 빌바오는 스페인 최고의 관광도시가 되었다. 이렇듯 현대의 도시들은 낙후된 지역을 예술을 통해 재생, 복원, 재활성화 함으로써 예술과 지역, 예술과 도시가 공존하는 새로운 전략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의 가치는 그 자체로 존재한다. 그것은 영원할 것이다. 그것은 예술과 지역, 주민이 하나의 네트워크를 형성해 새롭게 공존해나가야 되는데, 우선 예술은 지역을 위해 지역(도시)의 기반과 문화를 바꿔나가야 한다. 또한 지역은 문화와 예술이 살 수 있는 기반과 거처를 마련해주어야 한다. 예술과 주민 사이에서 예술은 또한 주민의 삶의 질을 개선하고 새로운 문화생활로 업그레이드하는 결과를 낳아야 한다. 반면, 주민은 관객으로서 예술시장의 기반이 되고, 여건이 된다.
예술과 지역, 주민을 연결하는 새로운 삼각 네트워크는 각각의 지역 속에서 형성될 필요가 있다. 그러기 위해선 이를 연결하는 지역문화 코디네이터가가 필요하다. 지역을 하나의 예술공간으로 조성하는 코디네이터의 존재! 그러나 우리에겐 코디네이터가 없다. 따라서 우린 코디네이터부터 양산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많은 실험들을 통해 예술이 사회와 지역에 개입하고 관여하는 경로를 찾고 지역의 라이프사이클과 주민의 삶 속에 개입하는 방안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것은 장기적인 교육 프로젝트가 아니라 현장의 다양한 프로그램과 개입, 개발 속에서 비로소 찾을 수 있는 것이다.
관성은 우리에게 오랜 습관을 지속적으로 물려주려는 무언의 힘을 가하고 있다. 그건 현재대로 그냥 가자는, 번거로움과 귀찮음, 이익을 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사이에 결정된 힘의 구조와 같은 것이다. 이 관성을 깨야 한다. 지금까지 우리의 지원이, 우리의 예술정책이 과연 어떤 성과를 거뒀는지를 되돌아보고, 그 반성으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 벗어나려는 자에게 관성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 관성에 의지해 벗어나려는 자의 발목을 잡고 못 나가도록 하려는 힘이다. 우리가 저항해야 할 것은 그 힘이다. 그리고 그 힘으로부터 더 나은 세상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 그것이 지금 지역의 문화예술가들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