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낙선 딛고 인천 남구청장에 재선돼

민주화운동에 온몸을 던졌던 당진청년은 서슬퍼런 시대에 이른바 ‘시국사범’으로 수배를 밥먹듯이 당했고 급기야 옥고까지 치렀다. 아내와는 제대로 된 결혼식도 올리지 못하고 둘째 아들은 아버지가 옥중에 있을 때 태어났다. 지독히도 길었던 독재시대를 끝내고 이제는 ‘다같이 잘 살자’는 마음으로 또다른 할 일을 찾아냈을 때는 그의 나이가 어느새 서른 후반이었다. 2002년 지방선거에서 인천 남구청장에 당선된 그는 자신의 가치를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으나 2006년 재선에 실패했다. 그리곤 절치부심, 지난해 6월 2일 지방선거에서 다시 한번 남구청장에 당선됐다.

박우섭 인천광역시 남구청장은 그의 아버지(박주학)가 경찰 공무원이었던 관계로 충남 예산에서 태어났다. 박 구청장은 국민학교를 세 곳이나 옮겨 다녔다. 서산태안국민학교에서 기지국민학교(현 기지초)로, 그리고 4학년 때 당진국민학교(현 당진초)로 전학왔다.

그의 어머니(김기배, 83)는 대호지면 장정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기억하는 어머니는 초등학교만 졸업했지만 자식에 대한 교육열은 대단한 분이었다. 경찰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박봉으로는 1남 4녀나 되는 아이들을 가르치기 어려워 약한 몸으로 보따리 장사를 하시기도 했다고 한다. 박 구청장은 “아버지는 어머님을 무척이나 사랑하셨다”며 “몸이 약하셨던 어머니를 직접 챙기고 두 분이 밖에 나가실 때는 꼭 손을 잡고 돌보시며 다니시는 모습이 선하다”고 회고했다.

그의 아버지는 송악파출소장과 당진경찰서 경리계장을 맡아 오다 지난 1975년 정년퇴임했다. 젊은 나이였던 박 구청장의 아버지는 이후에도 당진성모병원 서무과장, 당진감리교회 신협 이사장을 3년간 맡았다. 박 구청장은 “아버지는 내가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경찰들이 숱하게 찾아와 감시하고 경찰서에 자진출두하면서도 한번도 내 뜻을 강제로 꺾으려 하지 않으셨다”며 “집안의 유일한 남자였던 내게 경제적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 노력하셨다”고 말했다. 그의 아버지는 지난 2005년 노환으로 별세했다.

제도권의 힘 필요하다 느껴 정계 투신

당진국민학교에서 서울 용산중학교로 진학한 그는 용산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학교 미생물학과에 입학했다. 그때는 그의 또다른 삶의 시작이었다. 초·중·고교 재학시절 말이 없고 내성적이었던 그가 유신정권과 전두환 정권의 군부 쿠데타 등에 맞서 수배와 구속을 번갈아 당하는 민주화 운동가가 되었던 것은 다른 이들을 놀라게 했다.

그는 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연행, 75년 긴급조치위반으로 제적, 그리고 80년도 신군부에 의해 조작된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3년간 수배생활, 86·87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두 차례나 투옥되는 등 수배와 구속으로 청년시절을 보냈다.

“유신시절의 연극반 동기들과 노동현장에서 문화운동을 하면서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민중들의 삶에 관심을 갖고 그 원인이 우리사회의 구조화된 부정부패와 민족분단에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힘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박 구청장은 1983년 김근태, 장영달씨와 최초로 합법운동의 장을 열었던 민청련을 결성했고 86년에는 민중운동의 대표조직이었던 민통련에서 활동했으며 87년 6월 항쟁을 주도했던 국민운동본부에서는 총무국장으로 활약했다. 88년 고 이범영씨와 민청련 공동의장이 되었고 89년 해방 이후 최대의 재야연합조직인 전민련이 결성되면서 대변인으로 활동했다. 90년 3당 합당으로 입지가 축소된 야당과 재야의 연합을 모색하기 위해 추진된 통추회의의 간사를 맡으면서 제도권 진입의 계기가 마련됐다. 그의 정치인의 삶이 여기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박우섭의 키워드는 ‘사람’과 ‘복지’”

박우섭 구청장은 “늘 ‘사람 중심’을 강조해왔고 정책으로 만들어 실현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다”고 말한다. 단순히 시혜를 베푸는 차원이 아닌 사람이 사람으로서 존중받고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사회적 기본권을 보장하는 근본적인 복지를 실현하겠다는 것이다.

지난 2002년 구청장에 당선된 그는 ‘사람사랑의 공동체’를 구정목표로 내세웠다. 구청장실에 찾아오는 구민을 한 사람도 피하지 않고 만난 것은 물론이고 일주일에 한 동씩 남구 23개 동을 모두 두 발로 걸어다니며 직접 사람들을 만났다. 그는 “때로는 험악한 언사가 오고가고 물리적 행동에 나서는 사람도 있었지만 지역민들이 선출해준 대표는 지역민들을 만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인천 남구를 위해서 기회가 다시 한번 주어진 것이 고마울 따름입니다. 주민을 섬기자는 겸손한 자세로 모든 공무원들을 통솔하겠습니다.”

인천 남구는 박우섭 구청장 취임 이후인 지난해 11월 당진군과 자매결연을 맺었다. 양 자치단체는 지난해 10월 인천 문학경기장에서 열린 제14회 당진해나루농산물축제 때 자매결연을 맺기로 합의하고 11월에 자매결연서 교환식도 가졌다. 박우섭 구청장은 “남구와 당진군이 서로 배울 점이 있다고 여겨 자매결연을 맺었고 무엇보다 고향이기 때문에 당진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인천 남구는 인구와 도시 발전과정 등 당진군과 유사한 점이 그리 많지 않다. 인구는 43만명에 달하고 서울의 위성도시로 인구와 공단이 급격히 늘어나며 도시화를 이룬 인천 남구는 자치단체가 점점 커지면서 인천 남동구(1988년)와 연수구(1995년)로 분리되기도 했다. 공단과 신시가지를 중심으로 분리되면서 남구에는 구 시가지만 남아 전보다 활기를 많이 잃어가고 있는 것이 사실. 실제로도 평균연령이 높고 보수적인 색채가 강한 지역이라고 통한다.

“도농간에 서로 Win-Win(윈-윈)할 수 있는 부분이 많을 겁니다. 인천에서 친환경무상급식을 실시할 때 값싸고 질좋은 당진 농산물이 크게 도움이 될 것이며 실제로 당진 농산물은 지난해 해나루농산물축제 때 이미 인정을 받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천 남구 역시 ‘복지’가 중요한 화두라고 한다. 활기를 잃어가는 도시에 활력을 불어넣고 인구를 다시 끌어모을 수 있는 정책과 기존의 주민들에 대한 복지가 그의 중요한 사업이자 과제였다.

“사람을 중시하는 고향이 되어달라”

박 구청장 역시 최근 전국 자치단체 중에서도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는 당진군의 모습을 잘 알고 있었다. 당진읍의 인구가 5만명을 넘어서 시승격 요건을 달성한 사실도 알고 있었다. 도시행정을 오랫동안 공부했다는 그는 당진군의 발전 방향에 대한 조언을 잊지 않았다.

“시승격보다 시승격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에 대비해야 합니다. 체계적인 도시개발도 중요하고 복지도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그 체계적인 도시개발을 세울 때 가장 중요한 가치관이 ‘사람 중심’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 수 있는 도시’를 만들어야 합니다.”

또한 지역 공동체가 붕괴되지 않도록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늘 그리워하는 것이 ‘포근한 마음 편한 곳’인데 출향인들 뿐만 아니라 그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포근하고 마음 편한 곳’이라고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만들어야 한다”며 “지역 공동체가 붕괴되지 않고 새로 유입되는 인구들이 그 공동체 속으로 녹아들 수 있는 정책과 가치관을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지난 2002년 당선됐을 때는 공부가 부족했던 저였습니다. 4년 전 낙선하고 도시 발전과 행정에 대해 공부해왔습니다. 당진군이 자문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손을 내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