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난 5일 현대오일뱅크배 K-리그 개막경기가 열렸던 포항 축구전용구장인 ‘스틸야드’. 포항 스틸러스와 성남 일화 천마의 홈 개막전이 이날 열렸다. 개막경기 탓이었을까, 2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스틸야드 구장은 경기 시작전부터 관중들로 빽빽이 들어찼다. 개막식에 이어 드디어 ‘킥 오프’. 이날은 황선홍 감독의 데뷔전이기도 했다. 경기시작과 함께 홈팀을 응원하기 위한 대형 통천이 관중석을 뒤덮었다. 경기 시작부터 포항이 성남을 거세게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축구전용구장의 힘이 발휘됐다. 선수들의 기합소리와 공과 선수들의 마찰 소리, 선수들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까지 관중들에게 그대로 전달됐다. 경기 시작 3분만에 포항의 용병 ‘모따’ 선수가 오른쪽의 크로스를 받아 헤딩슛으로 선제골을 넣었다.
골이 터지는 순간 모든 관중들이 일어서 함성과 박수를 쳤다. 선제골 이후도 포항은 성남을 격하게 압박하며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1대0으로 맞은 후반전은 전반전과 양상이 사뭇 달랐다. 전반 막판부터 몸이 풀린 듯한 움직임을 보였던 성남은 결국 후반 14분 동점골을 뽑아냈다. 후반에 교체출전한 성남 김진용 선수가 조동건 선수의 슛이 크로스바를 맞고 나온 것을 밀어넣어 동점골을 기록한 것.
그러나 포항은 후반으로 갈수록 움직임이 둔화됐다. 역전을 노리는 성남의 공세에 맞서 전방의 아사모아 선수와 모따 선수를 활용한 공격을 펼쳤으나 무뎌진 미드필드진으로는 경기를 뒤집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러자 황선홍 감독은 교체선수 카드를 꺼내기 시작했다. 전반 막판부터 몸을 풀기 시작한 선수들 사이에서 김기동 선수가 보였다. 그러나 경기가 끝날 때까지 ‘김기동’의 6번은 부심의 교체선수 번호판에서 보이지 않았다.
경기 종료 직전 포항은 성남 진영 측면으로 파고들던 모따 선수가 반칙을 얻어 페널티킥을 얻는 천금의 기회를 얻었다. 결과는 골키퍼의 선방. 무승부로 끝난 이날 경기. 김기동 선수의 올해 첫 출전은 다음으로 미뤄졌다.
1971년생. 우리 나이로 41살. 축구선수로는 이미 환갑을 넘긴 나이인 포항 스틸러스의 김기동 선수. 꿈 같은 이야기다. 다른 프로종목을 뒤져봐도 마흔을 넘긴 선수가 얼마나 있을까. 그는 이미 전설이라고 불린다. 축구선수로 500경기 출장을 올해 달성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격렬한 몸싸움과 강한 체력을 필요로 하는 축구경기에서는 서른 중반이면 대부분 은퇴를 준비한다. 그러나 아직도 현역이며 후배들과 주전 경쟁을 펼치는 그다. 500경기는 국내 선수 중 골키퍼인 김병지 선수를 제외하면 필드플레이어 중에는 최초의 기록이다.
송악읍 복운리 출신으로 송악초등학교와 신평중, 신평고를 졸업한 그는 1991년 곧바로 프로로 뛰어들었다. 포철(현 포항)에서 데뷔한 그는 현 포항 감독인 황선홍 선수와 데뷔 동기다. 대형 스트라이커로 주목받은 황선홍 선수에 비해 그는 신고선수로 프로생활을 시작했다. 황 감독이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최전방 공격수로 각광받는 동안 그는 뒤에서 묵묵히 실력을 갈고 닦았다. 언젠가 찾아올 기회를 위해. 2년간 포항의 2군에서 실력을 쌓은 그는 1993년 부천 유공(현 제주FC)로 팀을 옮겨 프로 데뷔전을 치렀다. 그리곤 그의 축구인생을 꽃피울 기회를 준 니폼니시 감독을 만났다.
“송악초 4학년 때 축구를 접했습니다. 그리곤 축구부를 찾아 예산으로 떠났는데 예산의 축구부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구타를 하더라구요. 어린 나이에 처음 집을 떠나 외로운 차에 몸까지 힘드니 미치겠더라고요. 너무 힘들어 다 포기하고 6개월만에 당진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퇴임하신 송악중학교 이만복 선생님이 당시 축구부 창단을 준비하던 신평중학교에 전학할 수 있게 도와주셨습니다.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었던 시기에 제 인생의 길을 정해주신 분이었습니다.”
이만복 선생님이 축구인생의 터를 잡아준 첫 번째 은사라면 부천의 니폼니시 감독은 그의 축구인생에 부스터를 달아준 두 번째 은인이다. 니폼니시 감독 밑에서 개인기를 갈고닦아 꾸준히 경기에 출장하면서 경기감각을 익혔다. 니폼니시 감독은 1994년부터 5년간 부천 유공(후에 부천 SK로 변경)을 이끌며 일명 ‘니포축구’라 불렸던 세밀한 미드필드 플레이로 한국 축구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주인공이다. 김기동은 니포축구 핵심멤버였다. 부천에서 두각을 나타내자 그에게 일생일대의 기회가 왔다. 월드컵 국가대표로 선발된 것이다.
1998년 차범근 감독이 이끌던 프랑스월드컵 대표팀은 아직도 회자되는 1998년 도쿄대첩에서 이민성 선수의 결승골로 일본을 꺾는 등 5연승을 달려 일찌감치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지은 상태였다. 반대로 일본은 3승2패로 중동팀에 밀려 본선 진출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숙적이긴 하나 일본팀과 동반진출하자’는 여론과 함께 일부에서는 ‘일본을 응원하자’는 이야기도 나왔다. 일본과의 잠실 6차전에서 그에게 플레이메이커라는 중책이 주어졌다. 그는 최선을 다했다. 최선을 다해 상대를 이기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2대0으로 패배. ‘한일전’이 갖는 의미는 대한민국 축구팬 누구나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행 비행기에 오르지 못했다. 그가 희생양으로 선택됐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경기가 그의 마지막 국가대표 경기가 되었다.
“그날 유난히 골운이 따라주지 않기도 했고 필사적이었던 일본에 많이 밀렸습니다. 그래도 저는 제 생애 첫 국가대표 선발이었습니다.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결과가 좋지 않아 아쉬울 뿐이네요. 제 축구인생의 아쉬운 순간이라고 할까요.”
그는 여전히 팔팔한 20대 체력을 자랑한다. 담배는 전혀 하지 않고 시즌 후에도 주량을 넘기지 않는다. 밤10시만 되면 어김없이 잠자리에 드는 등 자기관리를 철저하게 한다. 이같은 자기관리는 젊어서부터 해온 것이다.
철저한 자기관리는 결국 빛을 발했다. 서른이 넘은 나이에 모든 축구선수의 꿈인 우승컵을 들어올린 것이다. 그는 지난 2003년 친정팀 포항으로 돌아왔다. 주장을 맡아 팀의 첫 K-리그 우승을 견인했다. 리그 준우승만 두 차례에 그쳤던 포항의 숙원을 풀어준 것이다. 기록된 공격포인트는 많지 않았지만 팀을 지휘하고 경기를 지배했던 그에게 수상소식이 쏟아졌다. 연말 시상식도 그의 차지였다.
“제2의 전성기라고 하지만 월드컵을 앞둔 1998년보다 2007년이 제 최고의 전성기가 아니었을까요. 고대하던 우승컵을 들어올렸고 이제 축구선수로 이룰 수 있는 것을 다 이뤘으니까요.”
“할아버지께서 제 삶의 방향을 잡아주는 말씀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축구를 할 것이라면 ‘국가를 대표하는 선수가 되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무명 선수일 때도 묵묵히 지지해주셨습니다. 제가 국가대표로 선발되기 전 몇 달전에 돌아가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또 하나 해주신 말이 ‘꾸준한 노력만이 큰 선수로 성장할 수 있는 밑거름이라는 말씀이셨죠.”
그는 자신이 축구선수로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걸 알고 있다. 500경기 출전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올해 선수생활을 연장했지만 그는 500경기에 연연하지 않는다.
“황선홍 감독과 친분이 있다고 해도 황 감독은 팀을 책임지는 감독입니다. 저는 선수입니다. 팀을 책임지는 감독이 친분 있는 선수 기록을 위해 팀의 화합을 해칠 수는 없습니다. 제가 실력이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출전이 불가능하고 제가 출장하지 않을 것입니다. 황 감독에게 분명히 이야기했지요.”
500경기 출장이라는 목표에 매진하는 이유는 스스로를 다그치기 위함이라고 한다. 경기에 출전할 수 있을 정도로 몸 상태를 관리하기 위해서다.
“당진에 1971년생 제 친구들이 축구 동호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제가 축구화와 유니폼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서른 다섯명이 활동하는데 팀 이름이 ‘에반’(회장 양진국:018-423-0707)이라고 그리스어로 ‘영원한 친구’라고 붙였더군요. 어찌나 반갑던지... 다른 시군팀과 첫 경기를 했는데 형편없이 졌다고 분개하더라구요. 그래도 그 다음 경기에서는 점수차가 줄고 있다고 좋아하네요. 관심있는 분들은 참여할 수 있다니 이참에 홍보 좀 해주세요.”(웃음)
은퇴 후를 묻는 질문에 그는 자신과 동갑의 친구들이 만든 당진의 축구 동호회를 소개했다. 그가 당진에 올 때면 만나는 친구들이 만든 동호회란다.
그는 은퇴 후 제2의 축구인생을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었다. 2007년 우승 이후 타 팀에서 영입 제의가 오기도 했고 지난해에는 포항에서 플레잉코치를 제안했었지만 그는 모두 거절했다.
“제 삶의 황금기를 함께 한 포항에서 선수생활을 마치고 싶었습니다. 제2의 축구인생을 말한다면 궁극적인 꿈은 포항의 감독이 되는 것이에요.(웃음) 그만큼 포항팀이 좋아요. 포항 주민들도 저를 좋아해주니... 아직 말하기는 서툴지만 당진에서는 제 이름을 건 유소년 클럽팀을 운영해보고 싶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