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정미면 수당리는 당진의 대표 유적지인 안국사지와 봉화산, 은봉산 등 명산이 자리하고 있는 유서 깊은 마을이다. 게다가 한말에서 해방무렵에 이르는 당진의 대표적인 한학자 정재학이 머무르며 후학을 양성했던 곳이기도 하다. 한편 함평 정 씨의 집성촌이다. 수당리는 수백년 동안 마을을 지켜온 고목이 몇 그루씩이나 남아 있는 역사의 마을이다.

정미에서 가장 큰 마을, 수당리

봉황이 숨어들었다는 은봉산과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던 봉화산 아래 동향 마을 수당리는 정미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수당리는 으뜸마을이라는 뜻의 원당동과 명이 긴 마을이라는 뜻의 수동에서 한 자씩 따 이름 붙었다. 수당리는 5개반으로 이뤄졌다. 아래숫굴, 하수동이라고도 불리었다는 아랫말이 1반, 중간말이 2반, 윗말이 3반이다. 윗말은 옛날 주위산에 삼림이 울창해서 숯을 많이 구웠다고 한다. 원당골이 4반, 안국사지 주변 부락인 안국이 5반이다. 이 밖에도 마을 곳곳의 지형을 딴 옛 지명이 내려오고 있는데 의정골, 방죽골, 붓당골, 갈티꼴, 큰목골, 북골이 그것이다.

“명이 긴 동네라 하여 수곡동이라 불렸지. 옛날에는 100세 노인도 많았는데 지금은 없어. 그래도 요즘 시골동네 어딜가나 그렇듯, 수당리에도 노인들이 많아. 애들이라고는 다문화가정 아이들 몇 명이 전부고.”(정제현)

113가구가 거주하고 있는 수당리의 노인회에 등록된 65세 이상 노인은 108명. 이중 2/3 가량이 할머니들이다.

함평 정 씨 집성촌, 한학자 정재학의 고향

지금은 다양한 성 씨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지만 그래도 정 씨 문중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해 2004년에는 총 104가구 중 약 60%인 60여 호가 함평 정 씨 문중이었다. 1970년 중반에는 전체 150여호 중 80%가 정 씨 문중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집성촌은 일제시대부터 자리하고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내포문화 제16호> 2004.12.30 중 김남석 교사의 ‘마을연구’ 참고) 아닌 게 아니라 마을을 찾은 지난 7일, 경로당에 모인 8명의 어르신 중 6명이 함평 정 씨였다.

“지금은 많이 외지로 나갔지만 2, 30년 전만해도 한 집 건너 정 씨가 살았지. 정언겸 시조 할아버지의 11세손인 숙륜의 차남 효창의 후손들인 면천공파가 수당리로 낙향해 자리를 잡았지. 정 씨 다음으로는 류 씨가 많은 편이여.”(정제현 노인회장)

수당리는 함평 정 씨 문중을 중심으로 유학이 뿌리내리고 한학이 성행했던 마을이었다. 그중 당진의 대표 한학자로 꼽히는 정재학은 평생을 수당리에서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

“서당에서 조부(방재 정재학)님이 한학을 가르쳤지요. 옛날에도 국민학교가 있었지만 거의 한학을 배웠어요. 마을 서당에서 조부님이 동네 아이들을 가르쳤지요.”(정제세)

정재학과 함께 정 씨 문중에서 자랑하는 또 다른 인물은 정원환이다. 1919년 4월4일 대호지독립만세운동이 정미면 천의리에서 발생했을 때, 수당리 시위의 중심을 당시 55세였던 정원환이 이끌었다. 정원환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은 봉화산 봉화대에 불을 놓고 만세운동을 했다고 한다. (<내포문화 제16호> 참고).

주민들의 소풍지, 천년고찰 안국사지

천년고찰이 자리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 안국사지는 예부터 주민들의 소풍지였다.

“어릴 적에 안국사지로 놀러 많이 다녔지. 우리들 놀이터였어. 옛날에는 느티나무며 온갖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 여름이면 시원한 나무그늘을 만들었지. 사월초파일이면 동네 사람들이며 인근에서 온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어.”(정금호)

안국사지는 천여 년 전 고찰이었던 안국사가 자리 잡았던 절터로 고려시대에 번창했던 절로 추정되고 있으나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안국사지에는 보물급 유적이 남아 있다. 국내 유일의 발을 가진 석불 ‘안국사지 석불입상(보물 제100호)’과 ‘안국사지 석탑(보물 제101호)’ 그리고 배바위라고 불리는 커다란 바위에 명문이 새겨진 ‘당진 안국사지 매향암각(충청남도기념물 제163호)’이 그것이다.

어사 박문수가 쉬어갔다는 느티나무

수당리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만 2그루인 데다가 수백년 넘은 고목이 마을 곳곳에 여전히 푸른 잎을 틔워내고 있다. 그중 수당골에 자리한 500년 된 은행나무는 어사 박문수가 쉬어갔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있다.

정제훈 이장은 “수당리 곳곳에는 수백년 된 보호수들이 자라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500년 된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어사 박문수가 쉬어갔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고 소개했다. 원당골에도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느티나무가 자라고 있는데 나무 높이만 15미터에 둘레는 0.5미터다. 옛날에는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말고도 수당리에 감나무가 많았다고 한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 감나무가 남아 있다.

“감나무가 참 많았지. 바람이라도 세차게 분 날에는 인근 마을에서 떨어진 감을 주으러 오기도 했었어. 그때는 먹을 게 귀하고 배고픈 시절이었으니까. 지금은 감나무들이 많이 사라졌지만 곳곳에 아직도 감나무들이 남아 있지.”(정상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