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 16년 전 제2회 고래탑제를 지내는 있는 주민들의 모습 고래가 떠밀려 온 마을, 내경리
내경1리는 4개반으로 이뤄져 있다. 신 씨가 뚝을 만들어서 간척한 마을이라는 뜻의 신원말과 윗뜸, 중간뜸, 아랫뜸이라는 자연마을명이 주민들 사이에 전해 내려오고 있다. 내경리에는 마을명과 얽힌 전설도 전해지고 있다. 약 250년 전 서해에서 놀던 고래가 삽교천까지 물을 따라 올라왔단다. 그 고래는 썰물 때인 줄도 모르고 노닐다가 내경리 갯벌 위에 내앉게 되었다. 물이 빠져 나가지 못한 어린 고래를 불쌍하게 여긴 착한 청년이 바다로 돌려 보내려고 마을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했다. 하지만 주민들은 고래를 돌려보내기는커녕 하늘이 마을에 준 행운이라며 청년을 몰아 붙였다. 결국 고래는 죽었고 그 후 마을에 젊은 청년들이 죽는 환란이 일었다는 전설이다. 혹자는 주민들이 고래를 잡아 먹은 뒤 화가 닥쳤다고도 한다. 마을이 흉흉해지자 주민들은 죽은 고래의 원혼을 달래주기 위해 위령제를 지냈고 그제서야 마을이 평온을 되찾았다고 한다. 이러한 풍습은 한동안 명맥이 끊겨 있다가 17년 전 다시 시작돼 지금까지 매년 대보름 때마다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마을회관 앞 고래탑에서 고래제를 지내고 있다.
▲ 마을회관 앞 고래탑 이러한 전설로 마을에 고래원이라는 명칭이 생겼다. 이후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 ‘안 내(內)’ 자와 ‘고래 경(鯨)’ 자를 써서 내경리라 불리게 됐다. 고래가 마을 앞 갯벌까지 밀려왔다는 이야기와 내경리 부근이 우강 지형의 형성 과정에서 늦게 농경지가 조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을 미뤄볼 때 내경리는 250여 년 전 낮은 형태의 바다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내경1리의 너른 우강들판 소작농 많고, 천수답으로 고생하기도
“고래가 썰물에 마을 앞 갯벌까지 쓸려왔다는 이야기로 볼 때는 마을이 다 바다였다는 소리지. 하기사 우리 어릴적에도 안마당에서 게며 말똥쟁이 같은 게 나오곤 했으니까.”
“마을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었지, 왜~. 조금씩 갯벌이 간척사업으로 막히고 막혀서 지금의 지형이 된 겨.”
마을 주민들에 따르면 삽교천방조제가 들어서기 전까지 갯물이 마을 앞까지 들어왔었단다.
“지금도 송본내원장이라는 곳이 있어. 송본이라는 일본사람이 바다를 개간해서 원을 두르고 경작지를 만들었다고 하는 곳이여. 우리 아버지가 청년시절 때만해도 민어니 농어니 잡았댜.”
“전문적으로 어업을 하는 사람보다는 갯벌에 그물을 쳐서 물고기를 잡는 농민들이 있었지.”
지금 내경리는 너른 들녘에 삽교천 물을 농업용수로 사용하는 논농사가 주를 이루고 있지만 4~50년 전만해도 논농사가 수월치 않았다고 한다.
“예당저수지 물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죄다 천수답이었어. 굶기가 일쑤였지. 해일도 더러 일어서 바닷물 막느라 고생들도 많이 하고.”
“시집 와보니, 부자가 어디 있어. 논은 지천이었어도 물이 있어야 농사를 짓지. 가문 해에는 흉년으로 죽도 없어 못 먹을 지경이었어.”
“비가 안오니 농사짓기도 어려웠지만 식수도 문제였어. 논 한쪽에 둠벙을 만들어서 끓여먹었지. 가을이면 예산 구만리보에서 삽교천으로 흐르는 물을 막아서 논에 가둬두었다가 이듬해 모내기할 때 쓰기도 했지. 덕분에 어릴 적에 겨울이면 논에 가둔 물이 얼어서 썰매는 참 숱하게 탔구먼~.”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일본인 지주에게 논을 부쳐 먹고 사는 소작인이 대다수였단다. 해방 이후 토지분배가 이뤄졌지만 정부에 땅값을 상환해야 했기 때문에 주민들의 형편은 그리 나아지지 않았다고. 그후 예당저수지 물이 들어오고, 삽교천이 막히면서 주민들의 형편이 조금씩 나아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전히 대농보다는 소농이 더 많다.
▲ 2007년 폐교된 내경초등학교 모습 폐교된 내경초와 청헌장학회
내경리에는 2007년 학생 감소로 폐교된 내경초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내경초등학교가 들어서기 전,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강습소도 운영 됐었다고 한다.
“지금 마을회관 자리에 강습소가 있었지. 일본인들이 일본말을 가르쳤었는데 해방 이후에는 대포리, 신흥리 등 인근 마을에서도 아이들이 강습소로 한글을 배우러 다녔어. 남자, 여자가 모두 한 반에서 공부를 했었지. 그러다가 우강초등학교로 학교를 다녔고 내경초등학교가 분교돼 생겼지.”
▲ 고 손석윤 씨를 기리는 비 “돌아가신 손석윤 씨가 내경초등학교를 지을 때 땅도 내놓고 장학금도 조성했었어. 훌륭한 분이지.”
고 손석윤 옹을 기리는 비석은 아직도 폐교된 내경초등학교 정문 앞에 세워져 있다. 비석 뒤편에는 “청헌 손석윤 선생이시여, 그 이름 길이 빛나리라 소들에서 태어나 내고장 발전과 인재양성에 평생을 몸 바치시니 높고 깊은 그 은덕 청헌장학회에 담기어 영원히 흐르리다 세세토록 빛나리라”라고 적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