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랫줄, 왼쪽부터 이옥희(81), 김순분(93), 김영순(90), 정정숙(77), 장충웅(70), 정동일(83), 김기수(78), 김기만(63), 한봉길(78), 김주경(79), 이용학(78), 노인회장 신기호(79), 안임수(92), 김잠수(87), 하영순(86), 전만열(78), 안양숙(77), 부녀회자 이유회(50), 서성묵(89)
▲ 아랫줄, 왼쪽부터 이옥희(81), 김순분(93), 김영순(90), 정정숙(77), 장충웅(70), 정동일(83), 김기수(78), 김기만(63), 한봉길(78), 김주경(79), 이용학(78), 노인회장 신기호(79), 안임수(92), 김잠수(87), 하영순(86), 전만열(78), 안양숙(77), 부녀회자 이유회(50), 서성묵(89)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이유회 부녀회장, 신현철 새마을지도자, 신기호 노인회장이 꽃묘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우강면 강문리는 삽교호방조제가 들어서기 전까지 바닷가 마을이었다. 더군다나 내포지역에서 생산된 곡식들을 한양으로 올려보내던 조창과 포구가 위치한 해상교통의 요지였다. 지금으로부터 600여 년 전 우강에는 서산, 태안, 면천, 예산 등지에서 올라온 군·현 세미들이 줄을 이었다. 충청도 일대에서 거둬 들인 조세양곡은 북창과 남창에 보관되었다가 지금의 남원천을 비롯한 개천을 이용, 배로 범근내포 조창으로 보내졌다. 그리고 범근내포 조창(현 우강면 강문리에 위치)에 모아진 곡식들은 다시 배에 실려져 바닷길을 통해 한양으로 보내졌다.

옛 문헌에 따르면 성종 9년에 바닷물이 얕아져 배 밑이 땅에 닿아 아산 공제곡창으로 조운포를 옮기기 전까지 충청도에서는 범근내포 조창이 가장 큰 조창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은 세월에 묻혀 창터의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 졌다. 새의 부리를 닮았다하여 부리포라 불렸다는 현재의 강문리는 옛 바다와 포구가 모두 논으로 바뀌어 평야를 이루고 있다.

▲ 조세양곡창고가 있던 자리에 지금은 우강농협 창고가 자리하고 있다. 마을 어르신들의 부리포구 추억

예부터 충청 지역의 주요 포구였던 강문리의 부리포는 삽교호방조제가 들어서기 전까지도 사람들로 북적이는 마을이었다.

“여관이 2개나 있었고 주막들도 즐비했지. 어부들도 숱했고 지금보다 주민들도 많았어.”

바다가 막히기 전까지 부리포에는 인근 바다에서 건져 올린 생선을 가득 실은 어선들과 어부들로 북적였다. 연평도 등 인천 앞바다에서 잡아 만든 새우젓배도 자주 닿았다고. 어선 들뿐만 아니라 각종 곡식들과 인천으로 가는 사람들도 모여들었다.

“인천으로 가는 똑딱선이 하루에 한 번 물때에 맞춰 오갔었지. 인천에 한 번 가려면 7시간30분이 걸렸어. 그때 배 이름이 인충호, 이근호, 태창호 같은 거였지. 인충호가 제일 빨랐어. 이근호는 배 머리가 둥그렇게 생겼었고.”

▲ 삽교천이 흐르는 마을 안 하천. 예전에는 바닷물이 드나들었다. 논 농사 위주의 당시 풍경

삽교호방조제가 막히고 농업용수가 원활히 공급되면서 우강, 합덕 소들평야는 그야말로 곡창지대가 되었다. 전국 3대 평야에 꼽히는 소들평야는 농업용수가 제때 공급되기 전까지도 밭농사보다는 논농사가 주를 이뤘다. 대게가 천수답이었던 지라 겨우내 논에 물을 가둬두어 얼음벌판이 되거나 논을 배타고 건너다니는 진풍경이 펼쳐지기도 했단다.

“겨울 동안에도 논에 죄다 물을 받아 놓으니 길이 없어서 멀리 돌아서 다니기도 했었지. 뗏마라고 하는 쪽배를 타고 논을 건너다니기도 했고.”

장수마을, 주민들이 조성한 꽃길

강문리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 20여 명 중에 3명이 90세가 넘었다. 강문리의 최고령자는 올해 99세인 임풍호 어르신으로 아직도 집 앞마당을 산책할 정도로 정정하단다.

“강문리는 우강에서도 장수마을로 꼽히는 곳이여. 90세가 넘은 노인들도 많은데다가 아직까지 경로당을 오가며 이야기를 나눌 정도로 건강하지.”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은 “마을 이장과 부녀회장, 새마을지도자를 비롯한 청년들과 주민들이 마을길 곳곳에 조성하는 꽃길이 강문리의 자랑거리”라고 입을 모았다.

▲ 신기호 노인회장의 젊은 시절 집 앞 부리포에서 찍은 사진. 출처 우강면지

강문리의 옛 지명

강문리는 마을이 버그내 입구에 있다하여 붙은 이름으로 총 4개반으로 이뤄져 있다. 1반의 옛 지명은 감찰언이라 한다. 약150여 년 전 감찰벼슬을 한 사람이 원을 쌓고 마을을 이루어서 붙은 이름이다. 마을 주민들은 아직까지 2반은 뒤뜸이라 부르고 3반은 개뚝말이라 부른다. 삽교천이 막히기 전 마을 앞까지 들어왔던 바닷물을 막기 위한 뚝이 있다하여 개뚝말이라 불렀다고. 4반은 사발포, 사벌포, 불성구지, 부리포, 새말포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사벌포는 약 120년 전에 아산만간에 새로 뚝을 막아서 이뤄진 마을이라 한다. 신촌리와 가포와 경계에 있어 부리포 혹은 신벌포라고도 부른다. 부촌의 포구 혹은 부리처럼 쑥 나와 있는 곳의 안쪽에 포구가 생겨서 부리포라 불리었다고. 그러나 원래는 신자가 ‘새 신’이기 때문에 새벌포가 변해서 사벌포가 되었다(우강면지 112쪽 참고). 조선시대의 유명한 조운청이 있는 포구인 삽교천변이 범근내포를 현재의 부리포로 비정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