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비가 와야 생기는 우물’의 전설
급격한 산업화로 당진의 곳곳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신평면 운정리는 오지마을에서 당진의 관문으로 크게 변화한 마을로 꼽힌다. 구름 운(雲), 우물 정(井)을 사용하는 운정리는 예부터 굴우물이 있어서 구름물이라 부르던 것이 한자표기에 의해 운정이라 했다고 한다. 이 구름물은 신평의 진산인 망객산을 중심으로 아홉 군데에 있는 우물 중 하나다.
한편 마을 주민들 사이에서는 운정리 지명에 얽힌 또 다른 전설이 내려오고 있었다.
“옛날에 성인들이 지역마다 이름을 짓는데 여기가 구름이 있어야 물이 고이는 우물이 생긴다는 의미로 운정리라 하였다더구만. 언젠가는 우리 마을에 큰 우물이 생긴다고 말여. 아, 근데 그게 딱 들어맞았지 뭐야. 구름이 있어야 물이 고이는 우물이 먼고. 바로 삽교호 아닌가. 구름이 있어야 비가 와서 담수가 되는 큰 우물이 바로 삽교호를 일컫는 거지.”
물, 샘과 관련된 지명 많아
운정리는 총 8개 반으로 이뤄져 있는데 자연마을의 지명도 우물, 샘과 관련된 것이 많다. 1반은 오리물이라 하였는데 논가운데 있는 우물로 예전에 오리가 많이 앉아서 놀 정도로 물이 많았다 한다. 2반과 3반도 물과 관련된 지명인데 각각 샘실, 고름물이라 부른다. 4반은 개어덕, 개언덕, 개덕이라 불린다. 5반은 중구리로 원래 부락 지형이 알을 품는 둥지 형국인데, 둥우리라 불리던 것이 변해 중구리가 되었다고 한다. 6반은 가침물, 7반은 공세, 8반은 중뿌리라 부른다. 7반은 조선 초기에 조세를 저장하는 공세창이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8반은 공포와 맷돌포 사이에 있는 포구라 해서 중포라 불리었던 게 변해 중뿌리라 했다. 7반 공세와 9반 중뿌리를 합쳐 공뿌리라 불렀는데 산부리가 반도처럼 아산만가로 나와 있는 지형이다. 지금은 갯포구의 흔적이 사라지고 없지만 삽교호방조제가 생기기 전에는 공포나루터가 있어 인천을 오가는 배가 서곤 했다. 인천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한진나루터를 시작으로 맷돌포, 공포나루를 거쳐 남원포, 부리포까지 올라가 당진 사람들을 싣고 인천을 오갔다.
운정리 변화, 삽교호방조제로 시작
삽교호방조제가 생기기 전까지만 해도 운정리는 외지인 구경하기가 쉽지 않은 오지였단다. 하루에 한 번 인천으로 가는 배가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말도 마~! 동네에 트럭이라도 한 대 들어오면 애들이 차 구경하려고 줄줄이 쫓아 달렸으니께.”
“신평장에 한 번 다녀오면 저녁 해 먹기도 바빴어. 하루 왼종일이 걸렸지.”
“오지 중에 오지였다고. 서울 한 번 가려면 당진을 빙 돌아서 예산으로 가야했으니까.”
삽교호가 막히기 전까지는 어민들도 많았다. 고깃배에는 준치, 꽃게, 새우, 황적어, 삼치 등 다양한 어종이 가득했다.
“예전에는 고기가 숱했지. 지금은 바다 생태도 많이 바뀌어서 고기가 많지도 않지. 그래도 판로가 마땅치 않은 동네니 먹고 살기가 풍성하지는 않았어.”
“요즘엔 숭어나 망둥어가 가장 많어.”
삽교호방조제가 막히고 나서부터 천수답에도 물이 들어가고 유입 인구가 늘어나면서 사람 살기가 좀 풍족해졌다는 게 주민들의 이야기다.
강릉 김씨, 밀양 박씨 집성촌
운정리 아이들은 한정초등학교가 생기기 전까지 신평초등학교에 다녔다. 한정초등학교 초창기에는 학생 수가 600명에 달했는데 최근에는 졸업생이 6명가량밖에 되지 않는다. 그만큼 마을에 아이들이 줄었다. 6.25 전쟁 당시 크고 작은 격전은 없었다 한다. 다만 인천 옹진 등에서 바다를 건너 내려온 피난민들이 많았다고. 지금은 마을주민 중 외지인이 절반가량을 차지할 정도지만 여전히 집성촌이 남아 있다. 강릉 김씨와 밀양 박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운정리에는 조선 초기에 세워졌다는 명문이 있어 사학자들이 주목하는 돌미륵이 있다. 높이가 2m를 넘는 커다란 미륵상은 자연석으로 투박하게 다듬어져 있지만 삼도와 옷주름살 등을 표현해 미륵불의 모습을 갖추었다. 마을 미륵은 보통 조선 후기에 많이 만들어진 것으로 알려졌으나 신평 돌미륵은 세종 10년인 1428년에 조성됐으며 조성 시기가 확실하게 밝혀진 마을 미륵 가운데 가장 앞선 것으로 알려져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