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왼쪽 아래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최매랑(78), 김귀녀(78), 유기원(86), 한병란(77), 한영식(85), 홍순주(85), 최창옥(80), 박장구(75), 강육람(70), 이중학(70), 송명석(67), 가재우(78)
▲ (왼쪽 아래부터 반시계 방향으로) 최매랑(78), 김귀녀(78), 유기원(86), 한병란(77), 한영식(85), 홍순주(85), 최창옥(80), 박장구(75), 강육람(70), 이중학(70), 송명석(67), 가재우(78)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이 취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 새터말의 모습, 산아래 큰말의 모습도 보인다. 풀이 무성한 섬, 푸레기 마을

초락도리는 당진의 북서쪽 끄트머리에 위치해 있는 마을로 1리와 2리로 나뉜다. 그 중 고대면 당진포리, 석문 삼봉리와 맞닿아 있는 초락도1리는 4개반으로 이뤄져 있다. 1반은 고개와 산을 끼고 마을이 발달하였다 해서 산너머라 불린다. 2반은 새터말로 샛말이라 불리기도 한다. 큰말이라 불리는 3반은 마을의 중심이 되는 곳으로 경로당과 마을회관이 자리해 있다. 4반은 대호방조제가 들어서기 직전까지 동광염전이 있어서 동광이라 불리고 있다.

예부터 초락도리는 풀이 무성한 섬이라 하여 푸레기마을로 불리었단다.

“푸레기마을이라고 불린 건 어원이 정확하지 않어. 젊을 적에 어르신들에게 물어봐도 정확히는 모르시더라고. 다만, 풀 초(草)자랑 섬이었던 시절에 양반이 이곳에 낙향했다는 것에서 떨어질 낙(落)자를 따다 써서 초락도라 했다는 설이 있지.”

한편 간사지라는 뜻의 벌이 뻘->펄->풀로 바뀌고 입구라는 뜻이 더해져 간사지 입구에 있는 섬이란 뜻으로 풀어귀섬이었던 것이 한자표기를 하면서 초락도라 바뀌었다는 설도 있다.

이밖에도 초락도리는 ‘풀떼기’, ‘청학동’, ‘초호리’, ‘초락지’로 불렸으며 조선 중종 때 기록을 살펴보면 ‘초라지’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 초락초등학교 전경 염전, 어업 성행했던 어촌마을

초락도리는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초 섬이었다.

“1968년에 삼봉리, 당진포리와 연결이 되었지. 천황록 씨라는 양반이 밀가루 사업으로 원조를 받아서 주민들이 품을 팔아 연육사업을 했었어. 그리고 1980년에 대호방조제가 막히면서 빙 둘러 육지랑 연결이 되었어. 그 전에는 섬이었지. 뭍에 한 번 나가려면 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했어. 주민들도 지금의 절반밖에 없었고, 농사라고는 밭뙈기 조금이 전부고 대부분이 바닷일을 해서 먹고 살았지.”

“염전도 있지 않았남. 동광염전이라고 100정은 족히 됐어. 1정당 3천평이니 그 규모가 얼마나 되는지 짐작이 가지?”

“지금은 어업하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그때는 해산물이 넘쳐났지. 굴이며 낙지가 숱했고, 숭어니 농어니 고루고루 나왔지. 물고기 잡아서 당진장에 내다 팔아 먹고 살았어.”

초락도리가 섬이었던 시절, 주민들은 뭍에 나가려면 작은 나룻배를 타고 건너다녀야 했단다. 지금 금식기도원이 있는 곳이 초락도에서 가장 지형이 높아 나루터가 있었다.

▲ 초락도 금식기도원이 있던 곳은 섬이었던 시절 나루터가 있었다. “지형이 높으니까 물이 빠지면 갯벌 위에 돌로 징검다리를 만들어서 뭍으로 건너다녔어. 그러다 물이 가득 들어오는 날이면 나룻배로 건너야 했고.”

초락도에 학교가 들어서게 된 것도 이 나루터 때문이란다. 6.25전쟁 전부터 초락도에는 고 이수학 선생이 아이들을 가르치던 서당과 이후 고 최덕재(고대면 장항리) 씨가 가르치던 강습소가 있었다. 광복 이후 강습소가 폐지되고 나서 초락도 아이들은 바다를 건너 삼봉국민학교를 다녀야 했다. 그러다 사단이 났다.

“1967년도인가? 바다를 건너다니던 나룻배가 전복이 됐어. 그때 13명이 타고 있었는데 다 죽고 나(홍순주 노인회장) 하나만 살아남았어. 겨울이었는데 돌아오는 길에 바다 한복판까지 와서 세찬 바람과 파도에 못이겨 순식간에 배가 뒤집혔지. 해마다 풍랑으로 배가 전복되는 사고가 있었는데 그렇게 많은 주민이 목숨을 잃고 나니 다들 큰일났다 생각했지. 그 뒤로 주민들이 아이들이 매일 바다를 건너 학교에 가기가 위험하다고 분교 설립 운동을 시작했지. 돌아가신 홍순열 씨가 주축이 되어서 운동을 한 결과로 분교가 생기고 지금 초락초등학교가 들어서게 된 거야.”

▲ 1999년도에 노인회원들이 나들이 가서 찍은 사진이 경로당에 걸려 있다. 초락도에는 예부터 남양 홍씨가 대를 이어 살았다. 하지만 요새는 외지로 나가고 몇 집 남지 않았다고. 이후에는 소주 가씨가 터를 잡았고 지금은 밀양 박씨가 가장 많다고 한다. 6.25전쟁 당시에는 작은 격전 하나 없이 조용하게 지나갔다는 게 경로당에 모인 어르신들의 이야기다. 다만 배를 타고 인천 등지에서 숨어들어 온 피난민들은 더러 있었다고 기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