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도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어르신들. 왼쪽부터 이기정(90), 고간난(87), 송다봉(94), 국순임(74) 손광자(70), 손연례(74), 박수월(83), 이영옥(78), 김옥순(77), 최해순(92), 김성윤(76)
▲ 오도리 마을회관에서 만난 어르신들. 왼쪽부터 이기정(90), 고간난(87), 송다봉(94), 국순임(74) 손광자(70), 손연례(74), 박수월(83), 이영옥(78), 김옥순(77), 최해순(92), 김성윤(76)

[편집자주]

농한기에 접어들면서 마을 경로당이 ‘성수기’를 맞았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 지은 어르신들이 경로당에 모여 무료하고 적적한 시간을 함께 나누고 있다. 윷도 놀고, 장기도 둔다. 끼니 때가 되면 밥 당번을 정해 시래기된장국에 점심도 함께한다. 어르신들이 한데 모인 경로당을 찾아 마을마다 전해져 오는 전설부터 수십 년 전 마을의 옛 모습과 생활상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고자 한다. 옛날을 기억하고 있는 어르신들이 계신 지금 듣고, 기록해 놓지 않으면 작지만 소중한 마을의 역사가 그대로 묻힐 것이라는 우려가 ‘기억으로 쓰는 마을의 구술사’ 신년기획 ‘경로당을 가다’를 시작하게 했다.

자라처럼 생긴 섬, 오도

행정구역상 송산면 당산3리에 속하는 오도리에는 21가구가 살고 있다. 작은 산을 가운데 놓고 둘러앉은 작은 마을, 오도리는 이장을 맡고 있는 김종호 씨가 몇 안 되는 50대이고 대부분이 70대 이상의 노인이다. 게다가 21가구 중 13가구가 혼자 사는 할머니 단독세대다.

“할머니 동네지 뭐유~ 또 오도리에서 태어난 토박이는 한 집도 없어. 모두 순성이나 합덕 같이 다른 곳에서 시집 왔거나 이사를 와서 사는 이들이지. 그래도 70대부터 100세 가까이 된 어르신까지 모두 겨울이면 경로당에 모여 함께 지낼 만큼 정이 깊은 동네여~”

오랫동안 오도리 부녀회장을 맡다가 얼마 전 자리를 내놓은 국순임(74) 할머니가 마을의 내력을 풀어 놓았다.

“시집 와서 동네 어르신들한테 들은 이야기인데, 개천(보덕포와 이어지는 당진천) 건너 산하고 오도산이 하나였다네. 그런데 어느 날 천지개벽이 나더니 산이 쪼개져 다섯 개 봉우리가 됐대. 그 뒤로 개천 넘어로 떨어진 이곳을 오도라고 불렀다더구만.”

오도리는 오섬이라 하여 당산리 남쪽에 있는 마을이다. 지형이 자라처럼 생겼다 하여 오섬(鰲島)이라 불렸다고 한다. 오슴, 오도 등으로 불린 오도리는 큰오섬, 작은오섬, 뱃터, 들마당, 북성거지 등의 소부락이 속해 있다.

▲ 1.60년대 오도리 마을 전경(오른쪽 집이 오도이발소였다) 2.현재 오도마을의 전경 3.60년대 오섬에 길을 내기 위해 돌을 나르고 있는 주민들 4.지금은 포장길이 생겼다. 5.60년대 마을 주민총회에 나온 오도 주민들 6.오산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 오도리의 현재 모습

60년대엔 100호가 넘어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오도는 당진에서도 손꼽히는 번화가였단다. 석문방조제가 축조되기 전 오도리까지 조수가 드나들어 제법 큰 항구가 있었던 것이다. 특히 인천가는 여객선이 기항해 당진은 물론이고 서산, 운산 등에서도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졌다고.

“인천을 오가는 배가 하루에 한차례씩 다녔지. 배를 타러 다니는 사람들이 많아서 포장된 길도 있을 정도였지. 그게 아마 송산에서 당진으로 이어지는 최초의 길아니여?”(박수월, 83)

“왜 아니여~ 그때는 집들도 100호나 됐지. 이발소도 있었고. 고기 잡는 배도 많았지.”(고간난, 87)

“포구에서 낚시대를 띄우면 망둥이가 숱하게 잡혔지요~”(국순임, 74)

김성윤 할아버지의 말에 따르면 당시에 오섬에는 농사지을 땅이 많지 않아 대부분 뱃일을 했다고 한다. 뱃짐 나르는 일을 하는 인부들이 식솔들과 함께 오섬에 살았기 때문에 아이들도 많고 가구 수도 많았다고. 항구가 있었다는 걸 증명하듯 오도리 마을 안쪽에는 바다로 실어 날랐던 쌀을 보관하던 빛바랜 창고가 아직도 남아 있다. 또한 일본인이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비석을 포구 터에서 10년 전 발굴해 마을회관 앞 마당에 세워두었다.

1987년 공사를 시작한 석문방조제가 1995년에 완공된 이후, 바닷물이 막히면서 오도리 앞 개흙이 메워져 지금의 논으로 바뀌었다. 이후부터는 대다수의 주민이 논농사를 짓고 집 앞 텃밭을 가꾸며 산다.

6.25 전쟁 전후의 기억들

할머니들은 6.25 전쟁 전후의 기억들도 꺼내 놓았다. 저마다 기억들이 엇갈려 이견을 내놓는 부분도 있었지만 6.25 전쟁과 해방을 모두 오도리에서 겪은 고간난(87) 할머니가 가장 많은 기억을 하고 있었다.

“우리 마을에는 인민군이 주둔을 하진 않았지. 다만 그때는 여기저기 방공호를 안 판 산이 없었으니까 오섬에도 방공호를 팠었다고. 그래서 인민군들이 마을을 왔다 갔다 했어. 어느 날인가 마을 회의를 한다고 쌀 창고로 모이라고 하더라고. 나는 뭘 좀 하다가 날이 어두워졌을 때 느지막이 포구쪽으로 걸어가는데 지금은 죽고 없는 최 씨가 되돌아오길래 어디가냐고 물었더니 ‘아이고, 쌀 창고 앞에 휘발유도 가져다 놨고 대창을 3통이나 만들어 놨다’며 무섭다고 집으로 도망을 가는 거라 잖아. 그래서 나도 그 길로 집에 왔지. 근데 그 다음날에 바로 서울이 수복됐다고 하더만.”

고 씨 할머니는 6.25전쟁 전후에는 오섬에 집이 7~8가구 밖에 없었다고 회상했다. 다만 해방 이후, 잠시 동안 지금은 북한 땅이 된 옹진과 인천, 덕적 등에서 온 피난민들이 자리를 잡고 살았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