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학교사 거쳐 주부화가로, 돌아온 어린 날의 꿈

“새로 열린 길 위에서 떨리고 아픕니다”

창립전 가진 일요화가회 김 광 숙 회장

요사이 ‘갤러리 전람회의 그림’에서는 좀 색다른 전시회가 있었다.

전시회의 주체는 귀에 익은 무슨무슨 협회나 충남 무슨무슨회 같은 거창한 이름이 아니었다. <일요화가회 designtimesp=18505>라는 지극히 소박한 이름의 단체였다. 일상과 뗄레야 뗄 수 없는 일곱 요일. 그리고 그중 하나가 가진 소박함이라니... 1970년대와 80년대 ‘한국적 민주주의’나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 따위의 거대구호의 허구에 ‘화요회’ ‘목요회’라는 일상적 진실의 이름으로 맞섰던 시인 그룹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한국시단의 개성있는 거목들이다.

‘일요화가회’라는 이름은 ‘소박함의 도전’이다. 애써 무엇을 표방하지도, 내세우지도 않은 가운데 담고 있는 저력이다. 소금의 무거움을 녹여버린 소금물의 가벼움이다.

<일요화가회 designtimesp=18508>를 창립하며 전시회를 연 것은 당진의 주부들이었다. ‘평범한’이라는 형용사는 붙이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30~40대의 삶의 여백에 두터운 유채물감을 묻히며 꿈에서도 빛과 색을 찾아 헤매는 열정으로 평범함을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일요화가회 designtimesp=18510>의 창립전을 보러온 관람객들도 특이했다. 아이 손을 꼭 잡은 젊은 남자들과 여자들의 무리. 전시회가 시작된 11월 25일과 26일쯤에는 전시회장이 시끌벅적했다. 그중에는 시어머니와 그 친구들, 시아버지와 그 친구들도 더러 섞여있었다. 먼 지방에서 죽마고우의 변신을 기뻐하며 달려온 남녀 동창생들도 있었다.

화가 박기호씨가 지역문화사업의 하나로 개설한 ‘여성미술교실’이 바로 일요화가회가 태동한 토양이었다. 여성미술교실이 문을 연 지 2년만에, 고정멤버들의 윤곽이 잡히기 시작한 지 약 1년만에 이 교실은 일요화가회로 탈바꿈했다. 알에서 애벌레로, 애벌레에서 번데기로, 다시 번데기에서 아름다운 나비로의 거듭되는 변신 중 어느 한 대목임에는 틀림없지만 과연 어느 대목인지는 아직 잘 모른다.

창립전을 가진 회원들의 표정에는 설렘과 긴장이 있다.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느낌은 환희와 그만큼의 당황일 것이다. 새로운 세계의 낯설음과 신비감 속에서 암흑 속을 탐험하고 갈등한 후에 다시 세상을 향해 첫 번째 문을 열고 나온 이들의 떨림을 우리는 본다.

그리고 거기에 있을 옛꿈에 대한 향수와 향수하던 것에로 돌아와 쏟아내는 벅찬 회한과 그것을 숲사이로 가느다랗게 스며든 한줄기 찬란한 빛으로 표현한 그들의 ‘말’도 우리는 훔쳐본다.

그것은 시작이라고도, 끝이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늘 그러한 것(자연)을 새롭게 발견한 것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전시회에 ‘개심사 소나무’를 그려 출품한 일요화가회 회장 김광숙(35세)씨는 그림을 시작하고 나서 사물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고 한다. 특히 소나무를 그림의 소재로 택하고 나서는 세상이 소나무 나라로 보인다.

“전에는 눈에 띄지도 않던 소나무들이 눈에 자꾸 들어옵니다. 정말 예쁘다는 생각도 들고, 망가지거나 죽어가는 소나무를 보면 왜 저렇게 됐을까 안타깝기도 하고 마음도 아픕니다.”

소나무의 몸뚱이 위로 사방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표현하기가 가장 힘들었다는 김씨는 빛의 찬란함과 두드러짐은 그림으로 감당하기가 어려울 지경이라고 말한다.

그림을 그리게 됐다는 그 자체로 기뻤는데 이렇게 빨리 전시회를 갖게 되어 당황스럽기도 하고 한편 벅차기도 하단다.

작년 5월, 미술교실에 처음 얼굴을 내밀고 선그리기부터 차근 차근 배워나가면서 김씨는 ‘아! 이길로 오기 위해 그렇게도 먼 길들을 돌아서 왔구나’ 하는 감격에 젖었었다. 학창시절부터 그리기를 좋아했지만 딸부잣집에서 돈많이 든다는 미대에 진학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었다. 대학입학시험을 치르고 나서 선생님도 ‘한 3개월 학원만 다녔어도 미대는 갈 수 있었을 텐데’라고 토를 달았지만 그러려니 했다. 정작 김씨가 선택한 전공은 화학계통이었다. 그리고 당진에 오기 전에 한 7년간은 고등학교에서 화학을 가르치는 선생님이었다.

그때도 한번 ‘그림’을 곁눈질하고 싶던 때였다.

실업계 학교였기 때문에 음악이나 미술 중 한가지만 선택할 수 있었는데 마침 학교에서 음악 대신 미술을 택하게 된 것이다. 미술선생님이 오시면 그림을 배워야겠다 마음먹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새로 오신 미술선생님은 회화보다 컴퓨터 그래픽에 관심이 있는 분이었다. 그림 그릴 기회는 그렇게 다시 한번 그녀를 스쳐 지나가고 말았다.

아이 둘을 낳고 도저히 직장생활을 병행할 수 없도록 모성의 죄책감을 자극하는 일들이 생기면서 학교를 그만두고 남편을 따라 당진에 온 지 어느 새 4년. 이때의 일들 때문인지 유난히 아이들 키우는 일에 종종거리며 살던 어느날, 쨍! 하고 눈부신 기별 하나가 날아들었다. 여성미술교실이었다. 그토록 원하던 그림을 반생이 지날 즈음에야 그리게 되었으니 가슴이 벅찰 만도 했다. 작년 5월 그날부터 김씨는 가장 열성적인 미술학도 중 하나가 되었다. 스무명 남짓한 회원들이 회장으로 뽑아준 것도 이런 탓이었다.

힘든 날도 있었지만 아이들을 학교와 어린이집으로 보낸 뒤에는 빠지지 않고 유동초등학교로 갔다. 뒤늦게 그림을 시작한 회원들 모두가 열심이었지만 그나마 사정이 허락지 않아서 또다시 그만두는 주부를 보았을 때 참 마음이 아팠다. 애써 그린 그림을 뭉개버리고 그 위에다 새로운 그림을 그릴 때의 심정은 참담함과 매달림이었다. 이토록 고통스러운 그림을 왜 시작했나 뼈저린 회한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색과 빛에 몸살을 앓으며 꿈에서조차 색을 찾고 있는 자신을 느끼며 자신의 세계로 상큼 가고 있는 것이 스스로 두렵기도 했다.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열정에 그만 빠져버리고 말 것 같았다. 그렇게 1년 하고도 반년이 갔다.

다행히 남편은 김씨를 이해해 주었고 아이들도 엄마의 창립전 팜플렛을 학교에 갖고가 친구들에게 자랑할 정도가 되었다.

하지만 김씨는 아직 잘 모르겠다. 앞으로 자신이 갖게될 세계가 어떠한 것일지... 조심 조심 한발 앞으로 다가서고 있을 뿐이다. 취미 삼아 시작했지만 ‘대충’을 허락지 않는 것은 선생님만이 아니다. 그림 그 자체가 대충일 수 없는 것 아닐까. 그것은 치열한 일이다. 고통스럽기도 하고.

그러나 그 고통과 번뇌에 따르는 희열을 어떻게 버릴까. 새롭게 세상을 보는 일, 새롭게 세상을 받아들이는 일, 그 긴장과 떨림이 없다면 삶은 너무나 팍팍하고 무의미한 일상의 반복일 뿐이지 않겠는가.

김태숙 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