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의 원명은 가톨릭(Catholic)이다. 가톨릭이란 희랍어로 ‘보편적’, ‘세계적’이란 뜻에서 유래된 종교로 기원 1세기경에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베드로와 바오로 등이 완성한 종교이다.
클로드샤를 달레 프랑스 신부가 조선 가톨릭 잔혹사를 증언한 조선천주교회사(1874)에서 조선 제22대 왕 정조 때 충청도 홍주(현홍성) 출신 백정 황일광(1757-1801)은 양반들도 천한 신분인 자신을 사람 대접해 주는 천주교 공동체에서 구원의 빛을 보고 그는 수시로 내가 제일 천한 신분인데도 사람들이 너무나 점잖게 대해주니 이 세상에 하나, 또 후세에 하나, 이렇게 천당이 두 개가 있다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했다고 한다.
백정 황일광은 짐승취급을 받고 살다가 천주학을 배우고 예덕(禮德)을 펴던 천주교회가 그에게는 이 세상의 천당이었던 것이다.
황일광은 1801년 신유박해때 혹독한 고문을 당하면서도 배신하지 않고 순순히 망난이의 칼을 받고 순교했다. 황일광 시몬이 윤지충 바오르 등 순교동료자 122위와 함께 오는 8월16일 프란치스코 교황 내한 때 시복식에서 성인 다음으로 존경받는 인물인 복자(福者)에 오르게 됐다.
신해박해(1791), 정사박해(1797),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 등을 거치며 자생적으로 뿌리내린 순교자가 2만 명이 넘지만 성명이 밝혀진 신자는 수 백 명에 불과하다. 무명의 순교자는 천민이거나 하층평민이었기 때문에 관리들이 양반 이외에는 거의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8월15일 방문하는 우강면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의 탄생지다. 그의 증조부 김진후는 1814년 해미에서. 작은 할아버지 김종한은 1816년 대구 광덕정에서. 아버지 김세준은 1839년 서울 서소문 밖에서 차례로 순교했으며, 김대건 신부는 1846년 우리나라 사람으로는 최초로 신부가 돼 폐레오르 주교와 다부뤼 신부와 함께 입국해 전도하다가 그 해 서울 새남터(노량진 백사장)에서 순교했다.
솔뫼성지는 김대건 신부 증조부 김진후가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여 4대가 살았고 김대건 신부가 출생해 유년기를 살았던 곳으로 한국 천주교 성직자들의 모태와도 같은 곳이며 한국의 베들레헴이라 불린다.
합덕성당 크램프 신부가 김대건 신부 순교 60주년인 1906년 생가터를 고증했고 순교 100주년인 1946년에 기념비를 세웠으며 1973년 솔뫼성역화 사업을 시작했고 1982년 피정의 집을 건립해 순교자 신앙학교로 만들었으며 2004년 생가가 복원됐고 2005년 기념관과 성당이 건립됐으며 이어 광장을 조성하여 성역화 사업을 마무리 지었다.
클로드샤를 달례 신부가 잔혹사를 기록한 순교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서 그들이 목숨을 초개같이 버려가면서 지키려했던 것이 오직 종교적 신앙때문만일까 생각해 보니 의구심이 든다. 임진난과 병자호란으로 민생이 파탄에 이르고 부정부패와 사색당쟁으로 사회가 쇠락해진 조선 후기의 민초들에게 천주학은 새 세상을 열 수 있다는 구원의 빛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순교자들이 목숨걸고 갈구했던 새로운 이상사회는 아직도 꿈만 같이 멀게만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신분차별은 사라졌지만 더 냉혹한 신 신분사회계급이 생겨 극심한 양극화는 계층 간 갈등, 세대 간 갈등, 이념갈등, 빈부갈등 등 사회는 극심한 반목으로 분열되고 있다. 갈등은 칙갈(葛)자와 등나무등(藤)자를 쓰는데 칡넝쿨과 등나무넝쿨이 실타래 같이 한데 뒤 엉켜 서로 풀지 못하는 형국을 이르는 말로 갈등사회는 반목과 분열로 얼룩진다.
종교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는 사랑으로 갈등사회를 감싸 치유하고 인간 개인의 삶을 초월적이고 객관적인 가치와 연결함으로써 좀 더 심오한 존재로 나타날 때 현세의 천당으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사회에서 소외되고 가난과 싸우며 고통 받는 이웃을 외면하고 신에게만 매달린다면 그것은 우상숭배와 무엇이 다를까?
프란치스코 교황도 가난과 맞서 싸워라, 불평등에 무감각한 사회는 결코 평화와 행복이 오지 않는다고 말했다. 종교는 인간에 대한 사랑과 자비로운 관용이 있어야 하며 대가를 기대하지 않는 순수한 봉사의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