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4년 9월 16일 생. 91년이라는 긴 세월을 사는 동안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인연을 맺고 4남2녀를 낳았다. 그의 자녀가 또 다시 아이를 낳아 어느덧 증손주가 초등학생이다. 하지만 그 만큼의 세월 동안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 했던 친구들을 떠나 보냈다.
수많은 날들이 차준기 옹을 지나쳤고 지난 세월이 고스란히 그의 얼굴에 자리 잡았다.
트로트로 흥겹게 시작하는 아침
아침잠이 사라진 지 오래라는 차준기 옹의 일과는 새벽 3~4시부터 시작된다. 새벽부터 일어나 무료한 시간이면 몇 년 전부터 취미로 시작한 전자키보드 건반을 치기 시작한다. 어디서 배운 것도 아닌데 실력이 수준급이다. 좋아하는 트로트에 맞춰 키보드를 치고 때로는 동영상으로 촬영해 기록해 둔다. 악보도 잔뜩 쌓여 있다. 홀로 살고 있는 순성면 봉소리에 위치한 그의 집은 새벽부터 트로트의 흥겨움으로 시작된다.
이제 나갈 준비를 해야 한다며 그는 씻고 간편한 복장으로 준비한 뒤 진돗개 밥그릇에 사료를 쏟아 붓는다. 이제는 힘에 부쳐 개와 함께 산책 나가기도 어렵지만 그래도 함께 사는 유일한 반려견이다. 차고에서 번듯이 주차한 차를 꺼낸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가까운 곳은 운전할 수 있기에 오늘도 운전대를 잡는다.
고령의 비결은 ‘체력단련’
그가 매일 같이 향하는 곳은 당진시노인복지관 체력단련실이다. 당진시노인복지관 이용자 가운데 최고령이지만 건강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오전부터 체력단련실에 들러 부족한 체력을 단련하면 어느덧 차 옹의 반나절 지나있다. 다시 집으로 향한다. 2년 전 아내가 떠나 쓸쓸한 집이지만 그래도 책과 신문을 읽고 컴퓨터도 한다. 일제강정기를 겪은 만큼 일본어도 능숙해 일어로 일기도 쓴다. 그렇게 오늘도 91년에 하루가 더해졌다.
소방대장부터 마을 이장까지
고대면 진관리에서 3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어려운 형편에서 자란 그는 형과 아우를 전염병으로 일찍이 떠나보내야만 했고 집안의 외동아들로 자랐다. 6살 무렵 순성면 봉소리로 이사 와 순성심상학교(현 순성초등학교)에서 공부했다. 가정형편상 더 이상 학문을 이어가지 못한 것이 그에게는 못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 뒤 경방단(현 소방대)의 경방단원부터 시작해 소방대장까지 20여 년을 근무했다. 연반계장(마을 내 상을 돕는 조직), 봉소리 이장, 선거관리위원회 순성면관리위원장, 게이트볼 순성면분회장, 대한노인회 순성면분회장 등을 두루 지냈다. 지역에서 활동하며 바쁘게 살아왔던 그는 지금은 입지 않는, 옷장 안에 가득한 양복과 넥타이를 한참 동안 바라봤다.
2년 전 떠나보낸 예쁜 아내
한편 차 옹은 20세에 중매로 18세였던 아내 故 김연희 씨를 만났다. 그는 그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동네사람들이 다 칭찬할 정도로 미인이였다”고 말했다. 그렇게 70년을 함께 살았다. 사회활동을 열심히 하는 차 옹을 대신해 아내는 농사일부터 자녀 교육까지 도맡았다. 그래도 한평생 남편에게 꾸지람 없던 아내였다. 하지만 아내가 60세에 들어서면서 고혈압, 관절염 등의 질환이 찾아왔고 아픈 아내를 데리고 매주 서울·평택 등으로 병원을 오갔다. 아내 옆에서 차 옹은 인생을 담은 자서전을 적어 내려가기도 했다. 그렇게 병석에 누워 있던 아내는 지난 2013년 1월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도 하루가 지난다. 누군가에게는 바라는 것 가득한 새해지만 차 옹에게는 더 이상의 바라는 행복도 욕심도 없는 평범한 하루다. 지금까지 고생도 큰 행복도 없이 살았다는 차 옹에게는 더 이상 하고 싶은 일도 먹고 싶은 것도 없단다. 마지막으로 차 옹은 이제 운전도 그만둬야 할 것 같다며 “쉬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