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 최고의 욕망이 있다면 죽고 싶지 않은 것이고, 죽었다 해도 살아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일까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미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미라를 만들면서, 인간은 영혼과 그 영혼을 담는 껍데기인 육체로 이뤄져 있어 사람이 죽으면 육체는 남고 영혼은 하늘로 올라간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영혼은 언제든지 다시 돌아와서 무덤 안에 있는 육체 안으로 들어가서 부활한다고 믿었기 때문에 죽은 자의 육체를 잘 보존하기 위해 미라로 만들어 머리를 북극성을 향하여 놓았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아무리 완벽하고 과학적으로 미라를 만들지라도 인간의 힘으로는 죽음에서 살아 날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거대한 벽처럼 인간들에게 눌려지는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에피쿠로스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장 끔찍한 불행인 죽음은 사실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우리 자신이 존재하고 있는 한 죽음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막상 죽음이 우리를 찾아 왔을 때에 우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 있든 이미 죽었든 간에 죽음은 우리와 무관하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없고 죽었을 때는 우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현대의 죽음 철학의 대가로 알려진 예일대학의 철학자 셀리 케이건 교수는 죽음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죽는다. 때문에 잘 살아야 한다. 죽음을 제대로 인식한다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죽음에 대한 정의에서 인간적으로 극복할 수 없는 죽음의 한계가 보입니다. 에피쿠로스는 논리적으로 죽음이 인간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라고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셀리 케이건 교수는 우리는 죽기 때문에 오늘의 삶을 잘 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죽음 자체를 어떻게 처리할 수 없기 때문에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한계를 알고 최선의 삶을 살라는 소극적인 처방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인간의 힘으로는 죽음의 세력을 해결할 수 없습니다. 로마서 6장 23절에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했는데, 이는 죽음은 죄의 대가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은 철저히 영적인 문제입니다.
성경은 인간이 죽음으로 끝나는 존재가 아니라고 합니다. 죽음으로 끝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해서 증명하고 있습니다. 인간이 죽음으로부터 살아날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하나님이 죽음으로 살아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십자가에서 죽었다가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인간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요?
스위스 바젤대학의 신학교수인 오스카 쿨만은 “영혼불멸과 죽은 자의 부활”이라는 책에서 “기독교는 영혼과 몸이 모두 죽은 다음에 하나님의 능력으로 모두 사는 것이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도 예수님같이 부활하여 신령한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죽음의 권세가 해할 수 없는 신령한 몸을 입는 진정한 구원을 얻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께서 죽음과 불안과 고통 때문에 괴로워하는 사람을 찾아가시고 그 사람의 고통을 위로해 주시고 고통을 통하여 새로운 영적인 눈을 열어주시고, 새로운 인생의 사명을 가지고 살아가도록 하십니다.
사도신경의 맨 마지막은 “몸의 부활과 영생을 믿습니다”로 끝납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영혼과 몸이 모두 죽음 가운데서 살아나는 부활을 믿는다는 신앙고백입니다.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 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4)”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과거에 죽기 전의 몸이 다시 소생한 것이 아니라 신령한 몸, 영의 몸으로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를 따르는 공동체를 향하여 부활소망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