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과 경제? 믿음으로 풀기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분의 사랑의 뜻이 세상에 펼쳐지는 것이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많은 관심을 가지고 계시다. 그래서 “일”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주시고 일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본분이 되었다. “노동(일)이 신성하다”는 것은 이런 의미에서 생겨난 말이다.
그러나 인간이 낙원에서 추방되면서 일의 소중함은 인간에 의하여 왜곡되기 시작했다. 일로 인한 소득이 생기면서 이것이 황금만능주의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돈이면 다 된다’는 생각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품삯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노사간의 문제도 얼룩지기 시작했다.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다는 것은 너무 초라한 삶이 되기 때문이다. 일용할 양식만 있다는 것은 가장 불쌍한 자로 여겨지게 되어 몇대 후손들까지는 손끝에 흙가루 한점 묻히지 않아야 그래도 좀 편한 잠이 오는 것이 아니냐고 자신을 내세우기 시작했다.
정치인들의 떡고물 이야기도 생기고, 비자금이라는 말이며 사람의 신분과 환경을 보아가며 어두운 거래가 시작되었다. 이런 것들은 삶의 원칙도 아니며 경제원칙도 아닌 파괴행위였다.
드디어는 IMF라는 낯선 감시속에서 우리들의 호주머니 사정을 간섭받게 되었다. 그렇게 품삯만 계산하더니만... 이제는 누구의 잘못인지를 가릴 차례가 됐다고 한다.
경제를 정치논리로 풀었기 때문에 이런 어려움이 있다고 말들이 많은 모양이다. 그렇다. 경제는 경제논리로 푸는 것이다. 그렇게 당연한 것을 왜 이제와서야 생각해냈는지 모르겠다. 실상은 생각이 미리 있었다고 해도 소용이 없었을 것이다. 경제는 경제논리로 푸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는 믿음으로 푸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본래 주셨던 일의 신성함을 회복하는 것이 경제를 제자리로 오게 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 일의 신성을 회복시키셨다. 그 회복은 고통스러운 모든 것으로부터의 해방이며 부조리한 처사로부터의 온전함이다. 그러므로 그분에 대한 신뢰에서 경제는 해결되는 것이다.
이 신뢰가 형성될 때 세상보기에 아무리 천한 일이라도 최선의 가치있는 일이기에 얼마를 셈하는 것은 무의미한 일이다. 그 일에 대한 원칙적인 ‘부르심’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성숙해지기를 부르셨고 영원한 삶과 거룩한 삶에로의 부르심이다.
‘일’, 그것은 부르심을 수행하기 위한 우리의 선택이다. 우리의 성품과 삶의 모습이 그분의 형상대로 성숙해 나가라는 부르심을 이루기 위한 통로가 ‘일’이며 그 일은 언제나 신성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