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 지역현대사 발굴

이념갈등의 역사적 상흔을 찾아

지역에서 일어났던 아픈 전쟁의 상처

학살과 상쟁의 역사를 되짚는다

편집자주

서기 2000년,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평양에서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다. 실로 반세기만에 남북의 두 정상은 세월의 깊이 만큼이나 두껍게 느꼈던 마음의 장벽을 허물고 뜨거운 동포애를 확인했다. 이날의 역사적인 만남은 남북간의 냉전해소와 함께 이념대립으로 상처를 입었던 많은 사람들의 마음의 벽도 허무는 계기가 됐다.

같은 민족, 같은 마을, 심지어는 형제끼리도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비극적인 전쟁이 끝난 지 이제 50여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비록 총성은 멎었을지언정 전쟁이 남긴 비극적인 상처는 좀처럼 아물지 않고 있다.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을 정도로 끔찍한 일이 우리 지역에서도 일어났지만 누구도 이를 기록으로 남기려 하지 않았다.

솔직히 고백하면 우리 지역에서 일어났던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취재를 시작하면서 망설임이 적지 않았다. 해묵은 아픈 상처, 그것도 같은 지역, 한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 대하는 일이 그들에겐 아직도 고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쟁 50년만의 새로운 역사적 물결은 작은 농촌지역에서 일어났었던 일이나마 망각의 저편에 묻어두어서는 안 될 사안임을 일깨우고 있다.

이제 내년이면 21세기를 맞는다. 반세기 전에 일어났던 역사적 사실을 지금 정리하지 못하고 새로운 세기로 넘긴다면 어쩌면 영영 기회를 잃어버릴 수 있다는 위기감이 어쩌면 무모해 보이는 이번 기획을 추진하게 했다. 당시의 비극을 기억하는 세대들이 아직 생존해 있는 지금, 이를 기록으로 남기지 못한다면 향토사의 한 부분이 영원히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절박감 또한 작용했다. 이번 기획이 단절된 역사의 잃어버린 고리를 찾는 첫걸음이 되길 기대한다.

비극의 역사를 지닌 우강면 공포리

그날의 비극적인 일을 기억하는 듯, 아침부터 차가운 빗방울이 온 세상을 적셨다. 늦가을에서 이제 초겨울로 들어서려는지 차디찬 날씨에 비까지 내려 더욱 마음을 스산하게 했다. 합덕을 지나 우강의 드넓은 평야로 차를 모는 동안 빗방울은 더욱 굵어졌다. 추수를 끝낸 소들평야의 논은 짙은 가을빛으로 물들어 회색빛 하늘과 조화를 이뤘고 간간이 지나는 촌로들만 눈에 띌 뿐 한산한 들녘의 풍경이 끝없이 이어졌다.

미로와 같은 농로길을 이리저리 헤맨 끝에 마을 표지판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우강면 공포리. 삽교천을 막기 전까지는 바닷물이 들어와 고즈넉한 갯마을 풍경을 이뤘던 곳. 이토록 작고 한적해 보이는 마을에서 그토록 비극적인 일이 일어났다니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50년전 이 마을에서는 주민들의 기억속에 결코 잊혀질 수 없을 것 같은 비극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해방 이후 여운형 등이 주도했던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의 영향권에 있었던 당진지역, 그 중에서도 우강면 공포리는 좌익에 동조하는 주민들이 많았다. 당시 우강·합덕지역에는 대개의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갖가지 정치세력과 정당들이 존재했던 만큼 그리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전쟁의 불길은 이 마을에 비극의 상처를 남겨놓고 말았다.

전쟁 중에서도 인민군 점령시절, 좌익활동에 가담했던 이 마을 주민들은 국군이 진주한 후 집단학살이라는 혹독한 댓가를 치러야 했다. 주민 대부분이 좌익계열이었던 이 마을에는 그 바람에 전쟁이 끝난 이후 과부가 많이 생겼으며 제삿날이 같은 집이 많았다고 한다.

이 마을출신으로 좌익운동의 지도자였던 박기환(가명, 실명을 확인했으나 가명으로 처리함)씨를 포함, 수십명이 숨진 것으로 알려졌다. 당시 전쟁을 겪었고 지금까지 이 마을에서 거주하고 있는 한상학(68세)씨는 그때 일을 기억하기 싫은 듯 “그 당시 화를 당한 집들로 인해 대부분 음력 9월에 제삿날이 겹첬는데 지금은 그 가족들이 모두 마을을 떠났다”고 말하고는 말문을 닫았다. 그때의 일이 너무나 충격적이었고 주위의 곱지 않은 시선과 경찰의 감시 등에 시달려서인지 희생자의 가족들은 하나 둘씩 마을을 떠나 지금은 한 집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합덕의 유씨 형제들 비극에 휘말려

비극은 이보다 앞서도 일어났다.

전쟁이 일어나고 국군이 밀리게 되자 경찰들은 철수하기 직전, 그때까지 존속하고 있던 미군정 법령위반으로 수감돼 있었거나 리스트에 올랐던 지역 좌익인사들을 우강면 공포리와 송악면 한진의 바닷가로 끌고가 마구잡이 총살에 처했다. 이 때 오인각(가명, 위와같음)씨 등 지역의 좌익인사 다수가 희생당했다고 한다. 이러한 좌익인사들에 대한 무자비한 처형은 대전 산내 등 전국 여러곳에서 동시에 벌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시 합덕에서 의원을 개업했던 의사 유준학(가명, 위와같음)씨와 그의 일곱 형제들은 이때 모두 비극에 휘말렸다. 맏형인 유씨는 본래 평범한 의사였으나 자신의 동생들이 좌익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처형을 당하자 인민군이 진주한 후 좌익에 참여하게 된다. 수복된 후 유씨 역시 이 경력 때문에 처형당하는 비운을 겪는다.

인민군 점령기간에는 지주와

마을 유지 등 살해당해

국군이 후퇴하고 인민군이 들어오자 이번엔 우익계 인사들에 대한 폭력이 뒤따랐다. 6월28일경 국군 패잔병들이 석문에 상륙, 합덕에 집결해 금융조합 소유의 차량을 타고 철수한 다음 얼마 지나지 않아 인민군들이 진주했다.

인민군들은 우강면 강문리 부리포 해안으로 상륙해 합덕과 예산을 거쳐 전선으로 향했고 이때부터 세상이 뒤바뀌었다. 지역의 남로당 소속 좌익인사들은 합덕시장과 구양도다리 등 곳곳에서 인민재판을 통해 지주와 유지, 경찰가족 등을 살해했다.

우강 창리 옷밥골서 40여명 집단학살

우강면 공포리에는 해방 전에 일본인이 살던 기와집이 있었는데 인민군 점령기간에는 좌익인사들의 아지트로 이용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외지에서 유학한 젊은 지식인들과 토착 소작인들이 좌익활동에 참여했는데 이외에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참여했거나 부역에 종사한 사람도 상당했다.

약 3개월에 걸친 인민군 점령기간 동안 많은 우익인사들이 살해당했는데 특히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 등으로 인민군이 철수하기 직전 집단적인 학살이 일어났다.

합덕초등학교 유병산 교감은 이때를 음력 팔월 열나흘날로 기억한다.

“무척 달이 밝았던 밤이었다.. 이날 남로당원들은 주민들을 모이게 한 후 우익계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골라 손을 뒤로 묶은 다음 우강면 창리 옷밥골로 끌고 갔다. 그리고는 대장간에서 만든 쇠창으로 찔러 살해한 후 매장했다. 이날 밤 희생자들의 비명소리가 1㎞ 밖까지 들렸다.”

이날 학살현장에는 합덕중학교에서 학생회장을 역임했던 박우만씨도 있었는데 그는 목을 창에 비껴 맞아 구사일생으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고 한다. 다음날 매장현장을 발굴한 결과 36구의 시신이 나왔다. 두손은 모내기 줄로 묶여 있었고 얼굴과 온몸 곳곳에는 창으로 찔려 끔찍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송산리 전파관리소 부근서

좌익에 대한 보복 학살

국군이 다시 진주하게 되자 이번에 좌익인사들에 대한 우익의 보복이 시작됐다. 태극동맹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청년단은 인민군 점령시 좌익활동에 참여했던 인사들을 색출했다. 좌익활동에 가담했거나 부역에 참가한 주민 등 여러명이 살해당했다. 특히 우강면 송산리 전파관리소 부근에서는 좌익인사 및 부역자들에 대한 집단학살이 진행됐다.

남민우 대한노인회 우강면 분회장은 “치안대원들이 좌익인사들과 부역자들 70여명을 끌고 와서 전파관리소 옆에서 총살했다. 그 중에는 죄없는 분들도 상당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가족들과 이웃들은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지만 오랫동안 쉬쉬하고 지낼 수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합덕초 교사 및 후원회장도

전쟁으로 숨져

전쟁은 당시 당진에서 제일 큰 초등학교였던 합덕초등학교(당시 합덕공립국민학교)에도 큰 상처를 남겼다. 인민군 점령 당시에는 학교 후원회장을 맡았던 이종순씨가 살해당했으며 학교명이 합덕인민학교로 바뀌기도 했다. 또한 좌익계열 인사로 전쟁전에 평교사로 재직하다가 인민군 점령시 30대의 젊은 교장을 지냈던 강선홍(가명, 위와같음) 교사 등 수명도 국군 진주 후 살해당했다.

해방후 우리말과 글을 가르쳤을 뿐인 학교. 그러나 민족의 현실과 미래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개인의 생명을 파괴해버린 비극은 학교라는 성역도 비껴가지 않았다.

강 교사를 기억하는 제자들은, 환갑이 지난 지금까지도 남달리 책임감이 강하고 열성적이었던 그분의 죽음을 안타까워 하고 있다.

파란만장한 현대사와 함께한 소들평야

옛부터 드넓은 소들평야를 끼고 있어 곡창지대를 이뤘던 우강·합덕지역은 오히려 이로 인해 파란만장한 역사의 한축을 담당해야 했다.

평야지대에 위치했던 까닭에 영세 자작농 보다는 지주와 소작관계가 대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로인해 소작일을 찾아 외지인구가 유입되기도 했다. 이들 소작인은 5할에서 7할에 이르는 고율의 소작료를 지주에게 바쳐야 했으며 그외에도 각종 조세로 생계조차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불안정한 사회·경제적 구조는 언제든 내부로부터 폭발할 잠재적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갈등은 1893년 합덕농민운동과 이듬해 갑오농민전쟁으로 표출되면서 처절한 농민항쟁으로 이어졌다.

일제시대 동안 지속됐던 치열한 갈등과 대립의 관계는 해방 이후에도 지속됐다. 과거로부터 지배권을 유지해오던 봉건지주와 친일파는 새로운 토호세력으로 재등장했으며 대부분의 소작인들은 여전히 고율의 소작료에 시달렸다.

한편 당시 우강면 부리포에는 인천을 오가는 배가 드나들었으며 이를 통해 외지인과 함께 서울에서 수학했던 지역학생들의 많은 왕래가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새로운 문물과 사상이 유입됐고 우강·합덕주민들의 정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대토지 소유제와 소작관계로 인한 가혹한 수탈, 인천을 오가던 여객선 등으로 인해 합덕·우강지역은 군내 어느 지역보다도 좌익운동이 활발했으며 따라서 이념전쟁으로 인한 많은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그러나 이러한 비극적 사건은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하고 명확한 역사적 규명의 노력도 없어 사람들의 기억속에서 점차 잊혀져 갔다. 당시 피해를 입은 좌우익의 가족들은 평생 한을 안고 살아야 했다. 특히 좌익활동 가담자의 가족들은 주위의 시선과 경찰의 감시, 각종 연좌제 등으로 고통받아야 했고 이로 인해 정든 고향을 떠난 경우도 허다했다.

역사의 비극과 후손의 과제

벌써 50년이 흘렀다. 한 민족간에, 심지어는 한 마을 주민들간에 죽고 죽여야 했던 아픈 기억도 반세기가 지난 오늘 점차 잊혀져 가고 있다. 그러나 ‘규명되지 않은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말처럼 이러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지 않는다면 언제든 이러한 비극이 되풀이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해서는 안될 것이다.

가해자이든 피해자이든 이념갈등으로 상처받은 과거를 50년만의 남북 화해의 시대를 맞이한 오늘날 풀지 못한다면 진정한 화해의 시대란 단지 구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이제 아픈 과거의 상처를 다시 헤집고 사실을 규명해서 다시는 이 땅에 그러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후손들이 풀어야 할 과제이다.

홍석표/“전쟁 당시 갈등으로 오랫동안 상처 남아”

유병산/“학살 당시 비명 1㎞ 밖까지 들려”

서금구/"보복이 또 다른 보복 불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