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라가 못하면내가 하겠소

20세에 강제징용ㆍ원폭피해 당사자

“20일간 의식불명ㆍ실명ㆍ후유증, 내게 광복은 없었다”

고대면 성산리 노인회장 김종기씨

역사가 추상이 아니라 산 고통인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역사를 더듬는 일이 상처위에 소금을 흩뿌리는 일이다. 해마다 8월 광복절을 맞아 역사의식이 무디어진 사람들이 그때를 상기할 때면 이들은 아프다 못해 너덜너덜해진 자신들의 상처에 또 한번 상처를 덧발라야 한다.

당진군 고대면 성산리 김종기(72세) 노인은 해방후 52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이러한 고통을 고스란히 겪으며 살았다.

식민지 패권에 뒤늦게 나선 일본 때문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아시아 전역이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에 힙싸여 있을 때 김씨는 20세의 꽃다운 나이에 강제징용되었다. 당시 김씨는 석문보통학교를 나와 다른 소년들처럼 산나물도 뜯으러 다니고 소나무 기름도 짜서 일본에 바치고 있었다.

때는 1945년 1월. 연합국의 반격으로 패전이 임박하자 일본은 총알받이, 전쟁 노무자, 종군위안부를 식민지 조선에서 무작위로 차출해 자신들의 전쟁터로 내몰았다. 김종기씨 역시 이때 군직원ㆍ면직원과 함께 나타난 일본헌병에 이끌려 일본땅을 밟게 되었다. 당시 일본의 식민정책을 대행해온 조선사람들은 징용대상에서 제외되는 특혜를 입었는데 김씨는 그들을 모두 기억하고 있다.

“기억한다고 이제 와서 어쩌겠어. 다같이 식민지 노예이긴 마찬가지였는 걸.”

징용당시 김씨는 당진에서 3백여명이 당진주재소(지금의 당진경찰서 자리)를 거쳐 함께 일본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한다.

“트럭에 실려 신례원에 가서 열차로 부산까지 갔지. 그러고선 배타고 일본에 간 거야.”

식민지 본국 일본에 내린 김씨는 나가사키에 있는 병기공장에서 일했다. 밤낮없이 수백명이 교대로 일한 이곳에는 미국이 결정적으로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부터도 크고 작은 폭격이 있었다. 이 때문에 지상에 있던 병기제조공장이 위험해지자 일본은 거대한 터널을 만들어 그 안에 병기제작소를 두었다. 김씨가 이때 했던 일은 바로 터널을 뚫는 일이었다.

그러나 불행한 식민지 백성의 운명은 김씨를 한치도 비껴가지 않았다. 8월 6일 히로시마 원폭투하에 이어 8월 9일 김씨가 일하는 나가사키에 또다시 원폭이 투하된 것이다.

1945년 8월 15일, 감격의 조선광복을 김씨는 오스라 해군병원에서 의식을 잃은 채 맞이했다. 온몸에 1도 화상의 중상을 입고 20일간 의식을 잃고 누워있던 김씨는 4개월간 치료를 받은후 그해 12월 고향 당진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해방의 감격이라는 잠깐동안의 희열도 맛보지 못한 채 도리어 식민지의 상처가 젊음을 뒤덮어버린 김씨에게는 해방이 실감날 리 없었다. 아무도 모르는 김씨 혼자만의 고통과 싸움이 시작되었다.

“양쪽다리, 팔, 얼굴, 목에 상처가 형편없었고 머리카락도 다 나갔어. 한쪽 눈은 뵈지도 않구. 허리, 다리는 아파서 지금은 잘 걷지도 못해.”

스물한살의 나이에 폐인이 되다시피 해 고향에 돌아온 김씨는 걸을 수조차 없어 매일 누워서 지냈다. 꽃다운 식민지 청년의 비극이었다. 이때 가까운 삼화교회에서 전도를 받고 용기를 얻어 간신히 일어선 김종기씨는 아직도 독실한 크리스찬이다.

“그 뒤엔 그저 땅만 파고 살았지. 50년이 지나도록...”

말그대로 스물넷에 결혼해 2남매를 두고 평범한 시골농사꾼으로 살아온 그였지만 사실 그의 마음속은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그는 혼자 조용히 칼을 갈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역사와 태평양전쟁에 대해 책도 구해서 읽었다. 기자가 만난 김종기씨는 「근현대 한일관계사」에 대해 전문가 수준의 안목을 갖고 있었다.

50년간 혼자서 공부하고 되새기며 다듬은 생각들이었다. 일본어에도 능통한 김씨는 칠순이 넘은 요즘도 틈틈이 일본어 공부를 한다.

그런 김종기씨에게 길이 열린 것은 1991년부터였다. 이미 60대 중반의 초로에 접어든 때였다. 그해 난데없이 일본으로부터 초청장이 날라온 것이다. 원폭피해자에게 보낸 치료초청장이었다. 발신인은 일본인 피폭자 2세 자녀중 교직원들로 구성된 일본내 자선민간단체였다. 그들이 자체적으로 모은 기금으로 한국피폭자를 초청해 치료를 주선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46년만에 일본으로 가는 길이 다시 열리자 김종기씨는 마음속에 혼자 품어온 한서린 칼을 빼내들었다. 91년에 3개월간 1차 치료를 받고 돌아온 김종기씨는 92년 일본으로 다시 건너갔다. 일본인 피폭자들이 여는 평화집회와 추모식에 참석하고 일본현지 언론의 눈에 띄어 단독 기자회견도 하였으며, 문화회관 앞에서 일본의 범죄상을 성토하는 일본어 연설도 하였다.

김종기씨는 올해 2월 전국에 있는 원폭피해자들 20여명과 함께 「나가사키현 징용생존자 동지회」를 결성하고 일본정부를 상대로 강제징용자들이 입은 원폭피해보상과 당시의 미불임금ㆍ후생연금을 받기 위한 집단소송을 제기하였다. 이들의 활동은 요미우리, 나가사키, 일본신문, 아사히신문등 일본의 일간지에 주요기사로 다뤄질만큼 일본여론의 관심을 끌었다.

어쨌든 이 일로 김종기씨는 올해도 벌써 두번이나 일본방송사의 초청을 받아 일본을 다녀왔으며 한 마을에 사는 김종문(69세)씨를 일본 후생성에 데리고 가 요양시키기도 했다. 김종문씨는 17세에 징용됐던 성산리 주민으로 그 역시 피폭자이다.

정부와 국내언론의 무관심 속에 김종기씨는 마치 얽히고 설킨 한일관계의 실타래를 푸는 의로운 사절처럼 조용히 국경을 넘나들었다. 그러기를 7년.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일본정부는 끄떡없더라”는 게 김종기씨의 솔직한 말이다.

“일본이 국제전범이면서도 아직까지 전후보상과 사과를 하지 않는 것은 「한일국교 정상화」때문이야. 아니 왜 박정희 때 김종필이 일본에 가서 국교정상화 한다는 명목으로 보상금 얼마 타왔잖나. 일본은 그때 보상했다고 버티는 거고 정작 우리같은 사람들은 보상받은 거 없으니 어떻게 되겠어? 그게 바로 역사의 걸림돌인게지.”

1963년 이루어진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김노인의 말은 딱 부러진다. 당시 사회를 떠들썩하게 했던 학생ㆍ시민들의 「굴욕적인 한일국교정상화 반대」 요구처럼 김노인은 ‘제대로 된 피해보상과 국민적 사과’없이 국교정상화는 애당초 될 수 없는 일이었다고 말한다.

“표면상 한일관계는 좋은 관계같지만 지구상에서 가장 가깝고도 먼 나라가 일본이지. 그들은 중국이나 태국, 한국같은 동남아국가에 엄청난 죄를 지었어. 1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독일은 다른 나라에 대해서 보상도 완료하고 전후처리를 다 했다는데 일본은 대체 왜 버티고 있는 거야?”

굴욕감과 좌절감으로 보낸 젊은날이 떠올라서인지 얘기도중 미간을 찌푸리고 고개를 자주 떨구던 김노인의 말끝이 격해졌다가 이내 누그러졌다.

“그래서 우리가 싸우고 있는 거지. 우리가...”

김노인의 말은 끝없이 이어졌다.

“피해에 대한 정당한 보상을 받고 사과를 받는 일은 정부가 해야 돼. 그런데 김대통령은 한푼도 안받겠다면서 그러면 국교정상화가 될 것처럼 말하는데 천만에 말씀이야. 그처럼 야만근성을 가진 일본정부가? 천만에 말씀이야.”

그러나 김노인은 일본의 양심적인 학자들과 언론등 일본의 과거만행을 인정하는 민간인들에게 무척 호의적이다. 여지껏 일본을 넘나들며 맺은 교분도 교분이지만 김노인은 일본과 한국민간의 평화적쪾인도적 교류가 한일관계 개선의 열쇠라고 여긴다.

벌써 성산리에 있는 화산침례교회와 나가사키침례교회를 자매결연시켰고, 석문초등학교와 나가사키현에 있는 초등학교를 자매결연시키고 있는 중이다. 오는 8월 20일이 그쪽 학교에서 당진에 오기로 한 날이다.

김노인은 자신이 초야에 묻혀살았지만 뒤늦게나마 일본에 나가서 부분적인 활동을 벌인 것에 대해, 특히 나라의 자존심을 걸고 일본에서 하고싶은 말 다한 것에 자부심을 갖고 있다.

고대면 성산리 1구 노인회장이기도 한 김노인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우리가 일본에게 짓밟혔다고 일본을 미워하지만 난 우리선조들이 더 원망스러워. 조선시대부터 이율곡 선생의 양병설을 묵살하더니 결국 일본이라는 보잘것 없는 나라에 나라를 내주고 짓밟혔으니 우리에게도 책임 있지 않겠어? 그런데 지금도 봐. 보릿고개 넘은지가 얼마나 됐다고 흥청망청대고, 영웅은 많은데 뭉칠 줄 모르니 우리가 어떻게 일본을 이기겠는가?”

김노인은 앞으로도 오만한 일본정부에 대항하는 한편 민간인들과의 교류를 통해 과거를 허무는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것이 정부가 못한 ‘과거청산’을 대신 하는 김노인의 남아있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