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희 할머니

"죽는 것이 소원이지, 사람이 너무 그리워서”

혈육 한점이 없이 쓸쓸한 8십여생

백제토성 허리자락에 기대 사는 이영희 할머니.

백제는 678년의 사직을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에 의하여 문을 닫고야 말았으니 어찌 촌로인들 비분강개하지 않았으리요. 견훤

이란 사람은 원래 신라사람인데 백제가 외국군대의 말발굽에 짓밟힘을 눈뜨고 보지 못하여 후백제라는 이름으로 옛 백제의

땅을 다시 찾아 다스리기를 45년만에 역부족으로 신라군에게 내어주는 쓰라림을 맛보게 된다.

이 견훤장군이 쌓았다는 토성에 올랐다.(이 토성은 합덕읍에서 서쪽으로 10리 지경에 위치하고 있다.) 견훤이 군사들의 말에

물을 먹이기 위해 파놓았다는 연호는 논으로 물을 말리었고 방죽만 남아 자동차들이 지나가는 도로로 변해버렸다.

천여년 긴 세월이 지나갔지만 역사의 숨결은 지금도 내뿜는듯 토성 동쪽의 허리자락에 나지막하고 비스듬히 쓰러져 가는 초

가삼간이 자리잡고 있으니 바로 이집에 혼자 외롭고 쓸쓸히 여생을 의지하고 살고 계시는 할머니가 오늘의 주인공 이영희(81

세)씨다.

이영희 할머니가 이집으로 이사온지는 약 30여년 전이다. 남편 박씨와 남의 집 품팔이를 하면서도 오붓하게 살다 3년전 할아

버지가 세상을 뜨면서 혈육 하나없이 외롭게 살고 있다. 할머니의 과거를 말해주듯 10년 전부터 굽기 시작한 허리는 지금은

직각으로 굽어 걸음도 제대로 걷지 못하는 꼬부랑 할머니가 됐다. 정부 거택보호자로 쌀과 몇만원의 돈으로 목숨을 겨우 부

지하고 있다.

이영희 할머니는 전남 여수에서 뱃길 두어시간 되는 아주 작은 섬에서 태어났다. 9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도 뭍으로 돈

벌이 나가 소식없기를 1년이 흘렀다.

3.1독립만세가 전국으로 퍼질때 섬의 몇 안되는 남정네들이 하나 둘 뭍으로 아무말 없이 배를 타고 떠나갔다. 이때 어린 이영

희도 아버지를 기다리다 지쳐 이웃집 아저씨가 뭍으로 가는 배를 탈때 함께 배에 올랐다. 10세 때의 일이다.

배창에 엎드려 몇시간을 배멀미에 시달리다 사공이 내리라고 호령을 하여 고개를 쳐드니 혼자만 남아 있더란다. 한숨과 눈물

을 흘리면서 배에서 내리니 난생 처음으로 많은 사람을 구경할 수 있었다고 그때의 사정을 기억해낸다.

이영희 소녀가 내린 곳은 목표였다. 부두가에서 서성대는데 낯 모르는 아주머니가 와서 갈데가 없으면 자기집에 가자고 하기

에 따라갔다. 그 집에서 애들을 돌보고 집안청소, 빨래등을 하면서 얹혀살기를 9년을 했다. 할일도 많고 주인 아주머니가 어

찌나 무섭게 굴던지 9년을 살면서 대문밖을 나가보지 못했다고 한다.

19세에 겨우 철이 들어 집에 드나드는 외부 사람들 귀동냥으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접했다고 한다. 기왕 이렇게 된바에 세

상구경이나 하겠다고 마음을 먹고 주인집 아주머니를 1년이나 졸라 겨우 돈 몇푼 받아쥐고 무작정 서울행 기차에 몸을 올려

놓았다. 기차도 처음 보았지만 타보기도 처음이다. 그때 기차에 타고 있던 사정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기차 화통에서 어찌나 큰 소리를 질러대는지 귀가 멍멍하고 기절을 하여 한참동안 정신을 잃었었지. 깨어나 창밖을 내다보

니 기차가 달리는 것이 아니라 산이 지나가고, 집이 지나가면서 정신이 아찔하여 내가 여기서 죽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어 난

내리겠다고 벌떡 일어나니 옆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색시 기차 처음 타보는구먼. 가만히 앉아 있으라고’ 하면서 깔깔대며 웃지를 않던가. 그래서 창피도 하고 멋적어 풀썩주저 앉아 있었지.”이라하여 몇일만에 들어선 곳이 아산군 신창면의 이씨댁이다. 거기서 눌러지내기를 15년이 또 걸렸다. 이집은 부농에다가 요

새말로 하자면 위탁영농회사를 차리고 있는 집이다. 이영희씨는 부모없는 시름과 젊음을 달래기 위해 오직 일에만 전념하며

밤낮을 가리지 않고 세월가는 줄 몰랐다고 한다. 모내는데 어찌나 손을 빨리 놀리는지 손이 보이지 않을 정도여서 함께 일하

는 동료들이 만일 기계가 있다 하더라도 저렇게 빨리는 모를 꽂지 못하겠다고 칭찬이 자자했다고 은근히 자랑도 곁들이신다.

"섣달 그믐에 세상 뜬 영감, 정초다 아무도

오지않고 혼자 밤새도록 시신 염을 했지”

신창에서 박씨라는 분을 만나 살림을 차리셨는데 할머니 나이 33세 때이다. 2~3년 있다 30여년전 바로 합덕읍 성동리 오늘의

집으로 이사를 오셨다. 박씨 영감님은 장애자로 팔과 발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였단다. 그래서 함께 사시면서도 온갖 어려운

일은 도맡아 하면서 먹거리까지 마련해야 했다. 끝내 자녀를 보지 못했다. 3년전에 박씨 영감님이 운명을 하셨는데 바로 그날

이 섯달그믐날이었다. 이웃들에게 초상을 알렸으나 정초 제사 모신다고 아무도 와보는 사람이 없었다고 했다. 할머니 혼자서

밤새도록 시신을 염을 했다고 한다. 그때부터 혼자 집을 지키면서 살아가신다.

작년에 할머니의 노력으로 수입이 있었냐고 물으니 앞마당에 여름에 시금치 뿌려 2천원, 3년전 굴뚝목에 심은 도라지를 가을

에 뽑아 장에 가서 3천원하여 모두 5천원을 벌었다고 자랑을 하신다.

할머니에게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니 “죽는 것이 소망이지, 사람이 그리워서”하면서 눈물을 흘리신다.

매주 금요일 오후가 되면 합덕대건노인대학내 작은 카네이숀모임에서 도시락을 갖다드리는데 “도시락을 맛있게 싸갖고 와서

고맙긴 한데 그 아가씨를 보고 서로 얘기 나누는 것이 반갑단 말이야” 하신다.

산모퉁이에서 한 점의 혈육도 없이 쓸쓸하고 외롭게 사시는 이영희 할머니에게는 얼마의 성금이나 도시락보다도 사람의 숨

결을 느끼며 사람의 말을 듣고 말을 하는 것이 정말로 소중하다.

취재를 마치고 하직인사를 하니 “아직 해가 많은데...” 하면서 손을 놓지 않으신다. 이 애끊는 ‘사람 그리움’을 어쩌랴 싶다.

바로 이영희 할머니에게 말동무가 되어줄 분, 또 작은 정성이라도 전하실 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화주시면 사랑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해드겠습니다. 여러분의 정성을 기다립니다.

서금구 / 당진시대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