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위에 죽음과 빈 무덤, 그리고 부활
자기를 비우는 초월적 사랑, 유교의 인, 불교의 자비와 함께
당진천주교회 성병열 신부가 말하는
21세기 첫 부활절
들어가기 전에
어떤 신부가 쓴 묵상집에는 ‘고통’에 관한 이런 두가지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1) 한 사업가가 있었다. 그는 더운 지방에 사는 작고 화려한 열대어들을 관상용으로 내다팔면 큰 수익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열대어들을 운송하는 긴 여정을 시작했다. 운송을 하는 동안 열대어들이 노니는 물의 온도와 농도를 틀림없도록 조절하며 갖은 애를 썼다. 하지만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는 안타깝게도 절반이 넘는 열대어가 죽어 있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런 일은 그 뒤에도 몇번이나 거듭되었다.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모든 조건이 열대어가 살아온 물의 조건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그는 한 수도자의 조언으로 사나운 문어 한 마리를 열대어들과 함께 수족관에 넣어가지고 운송을 시도했다.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 사람은 자신이 간과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다. 적당한 온도와 농도가 열대어들이 살아온 환경의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열대어들은 수족관 속에서 사나운 문어의 다리가 쉼없이 파도를 일으키고 거대한 몸뚱이가 위협적으로 움직이는 가운데 오히려 생명보존의 본능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이다.
2) 한 곤충학자의 방에서는 한 마리의 나방이 막 고치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성장한 몸뚱이가 비좁은 고치에서 빠져나오는 모습은 그가 보기에 몹시 힘겹고 안스러운 것이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저도 모르게 나방을 응원하게 된 이 학자는 나방이 이러다 기력이 다 빠지면 기껏 고치에서 나오고서도 날지 못하는 게 아닌가 저으기 걱정이 되었다. 자신이 조금만 도와주면 나방이 고통을 덜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 이 학자는 핀셋으로 고치의 끝자락을 슬쩍 잡아당겨 주었다. 그러나 그렇게 고치를 빠져나온 나방은 뜻밖에 날개도 펴지 못한 채 움찔거리다가 죽고 말았다. 그는 몰랐던 것이다. 나방은 고치를 빠져나오는 힘든 여정을 통해 자신의 있는 힘을 다 모으게 되고 고치를 빠져나온 순간 그 탄력으로 힘껏 날개를 펴게 된다는 사실을.
예수의 부활은 수난과 초월의 드라마
교회력으로 오는 4월 15일은 부활절이다. 이날은 ‘민중의 왕’이라 불린 예수가 반역죄로 십자가형을 받고 숨을 거둔 후 사흘만에 다시 사람들 앞에 그 모습을 나타낸 날이다.
상식적으로 있을 수 없는, 그래서 도무지 믿을 수 없는 이 사건을 사람들은 ‘기적’이라고 부른다. 당시 사회적으로 보잘 것 없는 처지에 있었던 여인들을 통해 발견되는 예수의 빈 무덤. 보잘 것 없는 여인들의 증언은 이일을 사실로서 입증하는 데 결정적인 걸림돌이었다. 하지만 여기에 모든 진실이 보편적으로 가지는 은폐성, 또는 비밀성이 있어 보인다. 어느때나 진실은 편견과 오만, 거부, 의도적인 은폐에 가려 쉬이 드러나지 않았으며 그것을 간절히 구하며 기다리는 소박한 사람들에 의해 발견되고 전해지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의 부활사건을 사실로 믿든, 믿지 않든 이 세계적인 성인의 행적을 더듬어 그 의미를 음미하는 일은, 그가 한때 평범한 인간으로 살았던, 지구라는 동일한 환경 아래에서 삶의 여정을 이어가고 있는 우리들에게 “삶의 눈을 우주적으로 확장해주는” 신비하고도 고마운 통찰력을 준다. 이것은 다른 성인들과 함께 예수가 후대를 사는 우리들을 위해 남긴 영원한 선물이다.
성탄절과 더불어 1년중 가장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당진천주교회 성병열 주임신부는 예수부활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다.
“예수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가장 드라마틱한 사건입니다. 성서적으로 볼 때 그것은 초월함으로써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때, 그때가 성자(聖子)의 탄생과 죽음, 부활이라고 했던 구약의 예언과 역사가 신약에서 성취된 것입니다.
이 부활사건은 크리스트교 사상의 핵심이기도 한데 그 의미는 여러 차원에서 접근해 볼 수 있습니다.
신앙적인 차원에서는 인간의 절대적 부정이자 한계선인 죽음을 넘어선 일로써 이에 앞서 일어났던 십자가상의 피흘림과 죽음을 통하여 인간이 구원됨을 의미합니다.
일상적이고 사회적인 차원에서도 이것은 대단히 큰 깨달음과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의 한계, 즉 이기주의의 울타리를 넘어 타인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이타주의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가까이는 가족에서부터 이웃간, 세대간, 계층간, 지역간, 국가간 갈등을 극복하는 ‘길’이 바로 이 부활의 메시지입니다.”
비운다는 것과 낮아진다는 것
여기서 신부님은 부활의 다른 의미인 <빈 무덤 designtimesp=22594>, ‘비운다는 것’에 대해 생각할 것을 권한다. 빈 무덤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어떻게 행동으로 옮길 것인가를.
“비운다는 것은 자기중심주의를, 이기주의를 버리는 일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일입니다. 예수의 삶은 가장 비천한 곳, 가장 낮은 곳에서 출발했으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이 또한 그러하였습니다. 빈 무덤에 이르기까지 예수의 삶은 그런 것이었습니다. 이 비우는 것은 텅빈 곳을 다른 무엇으로 채운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예수의 빈 삶에 채워진 것은 인류에 대한 사랑이었습니다.
부활은 기독교의 독특한 사상이지만 ‘사랑’은 모든 종교의 과제이며 같은 맥락입니다. 유교의 인(仁), 불교의 자비(慈悲)가 모두 인류에 대한 사랑을 일컫습니다. 중요한 것은 타인에 대한 배려와 존중을 어떻게 행동화하는가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속죄하기 위해 그분이 죽음까지 받아들인 것처럼 말입니다.”
부활의 때와 장소는 “오늘 여기(Here And Now)”
“부활의 의미를 이해하고 실천할 곳은 바로 현실입니다. 미래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내적인 자유이기도 하며 내적인 자유를 위해 궁극적으로 필요하다면 죽음까지도 넘어설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은 실존의 의미이며 결단의 의미입니다. 더 높은 곳에 다다르기 위해 낮은 데서 출발하고 자기를 비우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래야 세상을 밝히는 빛과 소금이 될 수 있습니다. 부활은 수난을 통해 거듭나는 것입니다. 예수가 죽음을 넘어 다시 태어난 것처럼 우리는 오늘 이것을 결단하고 행할 수 있어야 합니다.”
신부님은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강조하신다. 십자가 없이, 고통을 짊어지는 일 없이 부활은 존재하지 않으며 부활이 없는 십자가, 거듭남이 없는 고통 또한 맹목적이라는 것이다.
“간디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예수라는 존재를 사랑하지만 그리스도인들을 사랑할 수는 없다’고 말입니다. 여기에 신앙인들에게 주어진 부활의 과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의 과제가 있습니다.”
김태숙 부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