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섬포구가 번성했던 당시 주민들 중 대다수의 남성들은 어업에 종사했다. 더러 농사를 짓는 이도 있었고, 염전에서 염부로 일하거나 어선이나 증기선이 들어올 때면 하역일에 종사하기도 했다. 선원들의 아내들은 남편들이 가져온 생선을 다라에 이고 나가 판매했다. 그리고 오섬 여자들이라면 너나할 것 없이 그물을 떴다.

“중선이 다니던 시절 여기 여자들 수입이 그물 뜨는 거여. 집집마다 다했어. 몇 발 뜨느냐에 따라 돈을 받았지. 대바늘을 뾰족하게 깎어서 뜨는데, 농사일 안 하고 시간날 때마다 그걸 뜨는 거여. 실도 한 가지가 아니여. 그물일 맡기는 사람이 실까지 다 사다주는데, 그물이 차차 갈수록 구녕이 작아져야 혀. 제일 끝에 가서는 손가락이 겨우 들어갈 정도로 떠야 고기가 글로 다 들어가니께.”(김옥순)

한편 오섬에서는 포구가 한창 번성할 당시, 뱃고사와 당제도 이뤄졌다. 선주들이 정월이나 명절에 배에서 뱃고사를 치렀다. 배가 출항하기 전 돼지도 잡고, 오색기를 달아 고사를 지내며 선원들의 안전과 더불어 만선 풍어를 기원했다.

개별적으로 치르는 뱃고사 이외에 선주들이 함께 지내는 풍어제도 있었다. 풍어제는 어업에 종사하는 피난민들이 대거 이주해 오면서 시작됐다. 오섬의 풍어제는 10년 정도 지속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 산 있잖아. 대 하는 사람들이 다 절하고 우덜은 구경하고 굉장했어. 그때 굿쟁이들을 데려와서 굿을 했지. 그때 내가 새댁 때인께, 제 끝나고 산에 올라가 보면 조기가 이만씩 혀. 떡·사과·배 이렇게 네각지게 싸놨지. 그거 가져다 먹고 그랬어. 앞치마로 하나씩.” (고간난)

또한 오섬에서는 1946년부터 1991년까지 주민들이 마을에서 산신제를 지내기도 했다. 마을 산신제에는 선주들이 참여하지 않았으나 관심을 갖고 도움을 주었다. 마을에 덕망 있는 사람을 선택해 제를 책임졌다.

“마을에서 특별한 사람을 선택해서 산신제를 지내요. 제주는 집에서 목욕재계하고, 딱 정해진 사람만 산에 올라갈 수 있었어요. 자정이 되면 산에 올라가서 마을의 안녕을 빌었죠.”

우현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