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훈 선생의 셋째 아들이자, 송악읍 부곡리 필경사에서 태어난 심재호(85) 선생이 지난 7일 미국 버지니아주 알링턴에서 별세했다.

필경사(筆耕舍)는 1935년 심훈 선생이 소설 <상록수>를 집필한 곳으로, 1년 뒤 그가 36살의 이른 나이로 세상을 떠나기 다섯 달 전에 셋째 아들 심재호 선생이 이곳에서 태어났다. 같은 해 스러진 아버지의 생이 갓 태어난 아들의 생으로 이어졌기 때문이었을까. 심재호 선생은 세 아들 가운데 아버지를 가장 많이 닮았고, 그의 삶의 궤적 역시 또 다른 심훈이었다.

한평생 아버지의 유품 모아

필경사에서 나고 자란 심재호 선생은 사는 동안 아버지 심훈의 육필원고를 비롯한 유품을 찾아 정리하는 데에 힘썼다. 영화 ‘먼동이 틀 때’ 극본과 제작 시나리오 원본, 시 ‘그날이 오면’의 일제총독부 검열본 등 4500매에 달하는 육필원고는 모두 심재호 선생의 손에 의해 복원됐다. 이는 지난 2011년 열린 제35회 상록문화제에서 공개되기도 했다. 이후 심재호 선생은 심훈의 육필원고 및 유품 전사본 4000여 점을 2013년 심훈유품보존회를 통해 당진시에 기증했고, 전사본은 현재 심훈기념관에서 보관·전시돼 있다.

심재호 선생이 작고하면서 남기고 간 아버지의 육필원고 등 유품 원본을 소설 <상록수>의 고향이자 심재호 선생의 고향인 당진 심훈기념관으로 인도하는 문제와, 심훈의 상록수 정신을 이어나가는 것은 이제 남아 있는 자들의 몫으로 남겨졌다.

고향 필경사에 대한 추억

심재호 선생은 1936년 필경사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아버지 심훈이 사망한 뒤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졌고, 그는 할머니 손에서 자랐다. 서울에서 휘문소학교를 다니다 6.25 전에 다시 송악읍 부곡리 고향으로 내려와 심훈의 조카 심재영과 기거하면서 송악국민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났다. 지난 2011년 <당진시대>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필경사 주변을 거닐며 어릴 적 기억을 떠올렸다. 심재호 선생은 “필경사 앞마당에는 아버지 심훈이 심은 꽃나무들이 가득했다”면서 벽오동, 매화, 목백일홍, 불도화, 찔레꽃, 겹벚꽃나무, 향나무가 차례로 울타리를 만들었다“고 회상했다. 특히 찔레꽃으로 만든 아치가 대문 역할을 했다고 전한 바 있다.

동아일보 그만 두고 미국으로

아버지도 동아일보 기자로 활동했던 것처럼 심재호 선생도 동아일보에서 10여 년 동안 기자로 재직했다. 하지만 군사정권 시절 신동아 사건이 발생하기 직전, 정부의 언론통제와 검열을 견딜 수 없어 ‘기자가 글을 못쓰면 기자가 아니다’는 마음으로 사직서도 없이 1974년 돌연 미국으로 떠났다.

펜을 꺾었던 그가 다시 글을 쓰기 시작했던 것은 광주민주화항쟁 때문이었다. 한국에서는 전혀 보도되지 않았던 그날의 일들이 미국 언론에서는 자세히 보도가 됐고, 치밀어 오르는 울화통에 다시 펜을 잡았다. 당시 그는 샌드위치 가게에서 일하면서 글을 썼다. 1998년 발행한 저서 <서서 쓰는 글>은 당시에 쓴 글들을 엮은 책으로, 진실을 그대로 밝히지 못하는 한국언론에 대한 비판, 우리의 현실을 걱정하는 글, 이산가족문제 등에 관한 글들이 수록돼 있다.

심재호 선생은 1984년 워싱턴에서 재미한인신문 <일간뉴욕>을 창간해 13년 동안 편집국장 겸 발행인을 맡아 한국사회의 남북문제 등을 다뤘고, 수차례 북한을 오가며 이산가족찾기 운동을 하기도 했다. 특히 ‘형제를 찾으라’는 할머니의 유언에 따라 북한에 있는 큰형을 찾기 시작하면서 이산가족에 대해 깊이 있는 고민과 행보를 이어갔다.

시대의 고민 ‘상록수 정신’

한편 그는 혼자 전국을 돌며 아버지의 자료를 수집해 1966년 심훈 전집을 내고 아버지의 유작을 정리했다. 심재호 선생이 일생에서 가장 소중하게 간직한 것은 아버지의 친필원고였다. 그는 아버지의 뜻, 상록수 정신을 잇기 위해 한평생을 살아왔다.

“상록수라는 나무는 없어요. 상록수는 늘 푸른 나무들을 모두 일컫는 것이지 어떤 하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죠. 상록수 정신도 마찬가지예요. 상록수 정신은 농촌계몽운동만이 아닙니다.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 것을 고민하는 것, 그것이 상록수 정신이죠.” (본지 제732호 “이 시대의 화두에 대한 고민, 그것이 상록수 정신” 기사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