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
오랜 시간 동안 터를 잡고 있는 보호수와 누구도 찾지 않는 열녀문, 그리고 주민들의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전설들이 여전히 마을을 지키고 있다.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없어진 마을이나 없어질 위기에 처한 마을, 또한 자연마을 중에서도 농촌 고령화로 인해 전통의 맥이 끊길지도 모르는 마을의 이야기를 기록하고자 한다. 본지에서는 ‘우리마을 이야기’라는 기획취재를 통해 기사와 영상으로 마을의 이야기를 담아낼 계획이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취재·보도됩니다.
당진1동 읍내2통은 읍내리에서 분리된 마을이다. 읍내리에는 생갯골, 교동, 목사리, 무시(수)동 등의 다양한 자연부락이 존재했다. 생갯골은 현재 읍내2통 경로당 자리, 교동은 당진향교 자리, 목사리는 당진축협 사료공장 자리다. 또한 무시(수)동은 당진문예의전당 일원을 말한다.
가르치는 마을 ‘교동’
읍지에 따르면 교동(敎洞)은 당진향교가 있어 ‘가르치는 마을’이라는 뜻에서 이름 붙었고, 목사리는 항사(項沙)리라고 불리기도 했다. 이곳은 옛날 바닷물이 축협 사료공장까지 들어오던 시절 고기잡는 살을 매어두던 곳이었다고 한다. 옛날에는 사람처럼 앉아서 살을 쳐다보는 것 같은 큰 바위가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때 주민들이 깨뜨려서 주춧돌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주민들에 따르면 읍내리 일원에 아파트들이 건립된 부지는 논·밭·산이었다. 원충희 노인회장은 “내가 살던 곳이 변화하는 모습을 보면 그 시절이 그립기도 하고 아쉽다”며 “어린 시절 친구들과 함께했던 옛 흔적들이 모두 사라져 안타깝다”고 말했다.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읍내리가 읍내1리, 읍내2리, 읍내3리로 분리됐고, 이후에는 읍내2리는 6개의 통으로 나눠졌다. 읍내2통도 읍내2리에서 속한 마을이다. 현재 읍내2통에는 남산공원, 당진향교, 당진초등학교 등이 자리하고 있다. 원충희 노인회장은 “개발이 되기 전에는 읍내2통에 형편이 어려운 사람들이 많이 살았다”며 “남산 올라가는 언덕은 모여 있던 빈민가였다”고 회상했다.
남산→농촌지도소→도서관
주민들에 따르면 현재 당진시립중앙도서관 자리에 농촌지도소가 있었고, 이후에는 지금의 당진교육문화스포츠센터가 들어섰다. 원충희 노인회장은 “초등학교 6학년 때 친구들과 몰래 숨어서 남산에서 데이트하는 연인들을 구경했다”고 말했다. 김순영 통장은 “어릴적 가오리연을 만들어 남산에서 날리던 기억이 난다”고 전했다.
남산공원에는 부엉이바위가 자리하고 있었다. 현 상록탑 앞에 바위가 있었는데, 상록탑을 세우면서 바위가 사라졌다고. 김순영 통장은 “부엉이바위는 내 키만하고 둥근 모양이었다”면서 “부엉이를 닮진 않았는데, 부엉이가 자주 쉬어갔던 바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물을 흡수한 축구공 차면서 놀아”
한편 당진초등학교는 건립된 지 100년이 넘은 역사 깊은 초등학교다. 김순영 통장과 원충희 노인회장 역시 당진초를 졸업했다. 당시만해도 한 학년당 학급이 7~8개였고 한 반에 60명 이상의 학생들이 수업을 들었단다.
학교 정문(현재 쪽문) 앞에서 살았던 김순영 통장은 “학교 종이 울릴 때 등교해도 지각하지 않았다”며 “학교가 가까워서 늘 학교 운동장에서 놀았다”고 말했다. 이어 “씨름, 술래잡기, 공차기 등을 하며 놀았다”면서 “비가 내리는 날에는 공이 물을 흡수해 무척 무거웠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읍내2통은 우리 주민들의 추억과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곳이에요. 점점 변화하는 모습에 발전하는 것 같아 좋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옛 추억이 사라져간다는 생각에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해요. 더구나 이제는 옛날 마을의 모습을 기억하는 사람들도 점점 줄어가고 있어 안타깝습니다.”
주민 대표 한마디
원충희 노인회장: 개인적으로 우리마을이 효(孝) 사상이 살아있는 동네였으면 좋겠어요. 어른을 공경하고 이웃과 교감하는 화목한 마을이 되길 바랍니다.
김순영 통장: 7년 째 마을 일을 맡고 있어요. 남은 임기 동안 두 가지의 목표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을회관과 경로당을 하나의 건물로 통합 건립하는 것, 또 하나는 경로당 앞을 주민들의 힐링을 위한 꽃밭으로 조성하는 것입니다. 주민 편의를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