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진에서 일한지 10년이 넘었지만 나는 여전히 ‘외지사람’이다. 연세 있으신 분들이 나를 누군가에게 소개하실 때는 ‘외지 사람인디, OOO여’로 말씀하시고, 지금은 잘 적응했지만, 이 분위기에 적응하기에는 시간이 걸렸고, 때로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당진 역사문화를 형성하는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한진포구와 기지시줄다리기라고 생각한다. 한진포구를 통해 당진은 서울의 마포로, 인천으로, 가까운 경기도의 평택과 바닷길로 왕래하면서 해양 교통을 발달시켰다.

험한 태안반도의 바다를 통과하기 어렵다 보니, 상대적으로 안전한 서울에서 당진까지는 배를 타고 왕래하고, 그 아래는 육로를 통해 이동했던 것이다. 자연스럽게 터미널 역할을 하던 당진의 지리적 이점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뒤섞이면서 기지시 장터와 같은 큰 시장이 등장할 수 있었다. 아울러, 이러한 시장을 번성시키고, 과거 있었던 재난을 공동체의 화합과 단결을 통해 극복하고, 또 앞으로의 재앙을 방지하기 위해 줄다리기를 했다는 기지시줄다리기의 유래 설화는 지역사회에서 각계각층이 힘을 합쳐 위기를 극복한 좋은 사례이면서, 오늘날 당진 주민자치가 활발한 역사적 근거로서도 작용한다.

역사적으로는 당진에 뿌리내린 의령남씨 충장공파의 경우, 중시조인 충장공 남이흥 장군은 당진 땅을 한 번도 밟은 적이 없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평안도 안주에서 돌아가신 분이지만, 그분의 후손들이 당진에 자리를 잡았고, 지금도 ‘대호지 남씨’들은 지역사회에서 중요한 역할들을 많이 담당하고 있다.

매년 제사를 지내는 구봉 송익필 선생의 경우도 선생의 호인 ‘구봉’은 자신이 살던 경기도 고양의 ‘귀봉산’에서 유래한 것으로 경기도 사람인데 당진에 숨어 살면서 배후에서 당시 조선정치를 좌지우지하고, 결국 당진 땅에서 세상을 떠났다.

당진을 대표하는 지역 축제 중 하나인 상록문화제의 모티브가 된 심훈 선생 역시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돌아가신 분이지만 수년 동안 당진에서 잠시 머물면서 소설 상록수를 집필하고, 필경사라는 건물을 지어 지금까지 지역의 문화자원으로서, 지역을 대표하는 문인으로 널리 알려져있다.

당진은 이렇듯 해상교통로를 활용한 발달한 교통으로 도시가 발전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이 왕래했고, 이 사람들의 역할을 통해 오늘날의 당진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오늘날에 들어와서도 당진 경제를 견인하는 서해안 산업단지의 엔지니어들은 전국에서 모인 사람들로, 21세기를 전후하여 크게 증가한 당진시 인구들 대부분이 소위 ‘외지 사람’들이다.

다양한 사람들이 어울려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새로운 요소를 통해 지역사회는 더욱 활기차게 되고, 발전할 수 있다. 더군다나 오늘날은 문화 다양성의 시대로서 획일화된 문화가 아니라 다양한 문화가 소중한 자원으로 작용한다. 과거 당진이 수많은 사람이 오가면서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내고 이러한 사람들이 지역과 국가에 중요한 일을 했던 것을 보면, 앞으로의 방향은 분명하다. 다른 지역 출신의,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들을 따뜻하게 맞아주고, 우리 지역 당진에 잘 적응하고, 뿌리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그들은 이미 우리의 조상이었고, 현재 우리의 이웃이며, 앞으로 당진을 이끌어갈 미래의 인재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