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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 드나들던 삐어홀, 지금 그자리엔.."

사진 속으로 추억 속으로

"미군 드나들던 삐어홀, 지금 그자리엔.."

차원병 밝은사회 당진클럽 초대회장 정원식당 대표

2006년 6월 당진시대 게재

월사금이 없어 초등학교 졸업장도 받지 못한 나는 일찌감치 객지에 나가 떠돌다가 스무살 되던 해 고향 당진으로 내려왔다. 땅 한평도, 장사 밑천 한 푼도 없었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자장면집 배달부일 아니면 시장에서 100원에 3개 하던 밀가루 빵을 사다가 150원을 받고 되파는 일 등등 이었다. 그러다가 월세 가게를 얻어 빵집을 차렸고 만화가게를 하기도 했다. 도장 파는 기술을 배워서 인문당이라는 가게를 하기도 했고 생활잡화를 취급했다. 미장일을 하셨던 아버지를 따라 보일러 놓는 일을 하기도 했고 연탄숯 장사를 할 땐 새벽 4시에 가게문을 열어야 했다.

먹고살기 위해 몸부림친 나의 20.30대는 한마디로 전쟁이었다. 계림여관(지금의 금계여관자리) 계단 아래 1평도 채 안되는 공간에 방을 들여 집사람과 큰아이 셋이서 살부대끼면 살았던 날들. 한 사람이 똑바로 누우면 다른 한사람은 모로누워 칼잠을 자야 했던 때. 서로가 안타까운 마음에 밤새 교대로 칼잠과 단잠을 자던 그때가 이 사진들을 보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1

첫 번째 사진은 1970년도, 세를 얻어 어머니와 함께 운영했던 잡화점 풍경이다. 지금의 김한식 재활의학과 건물 옆에 있던 초가지붕의 상가였는데 월세가 천원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간판은 내가 직접 써서 달았다.

#2

두 번째 사진은 역시 70년대 지금의 시장오거리 부근에 있던 2층집의 세를 얻어 운영했던 맥주집 모습이다. 당진 최초의 호프집으로 일명 ‘삐어홀’이라고 불렀는데 당시 주요고객은 고산 미군기지에 와 있던 미군들과 카투사, 건달, 고위층 공무원들이었다. 맥주 한병에 280원 하던 시절이었는데 지방일간지에 광고를 낼 만큼 신경을 썼던 가게였다. 장사도 무척 잘되어 아가씨를 4명이나 두고 장사를 했다. 아가씨들은 월급이 따로 없이 손님이 주는 팁을 받아 생활을 했는데 미군들의 씀씀이가 얼마나 컸는지 맥주값보다 팁이 더 많았다. 이 맥주집을 나는 부득이 정리해야했다. 아가씨들한테 랄랄라 춤을 배우는 큰애모습을 보고서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장사도 좋지만 아이교육이 내겐 더 중요했다.

#3

세 번째 사진은 ‘삐어홀’의 내부모습이다. 교환이 연결해주던 수동식 전화기를 들고 있는 종업원의 모습과  축음기용 엘피판이 눈길을 끈다. 벽에 걸려있는 동그란 물건은 샹들리에로 반짝 반짝 불빛을 내던 조명기구다

- 다음호에 계속

© 당진시대 · 사진과 이야기는 주민이 들려준 것입니다. 원본 사진에는 워터마크가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