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포사업장은 1963년 전영익 씨의 주도 하에 내경리·대포리·소반리 등 3개 마을의 주민들이 연명 날인해 구성한 조합을 중심으로 진행된 공수면 간척사업장이다. 제방 1850m, 농지 18만 평을 개발한 내포사업장은 비슷한 시기에 진행된 신촌사업장 등과 마찬가지로 480 양곡사업 지원을 받아 전개됐다.

한편 내포사업장은 1968년 주도권 싸움으로 대표 취소 소송이 진행되어 120여 명의 주민들이 청와대 앞에 가서 시위를 했고, 1975년에 나온 재판 결과 지역주민들이 승소했다. 재판 도중 서산 무의탁 선도사업장 사람들을 동원해 집집마다 똥을 퍼붓는 등 행패를 부려 청와대, 치안본부, 검찰청에 주민들 일동을 연명 날인해 탄원서를 제출해 서산검사가 물러나고 깡패들이 잡혀 들어갔다. 당시 사람들은 “3000평 찾으러 갔다가 6000평 내버려도 찾아가겠다”고 하며 당시 비용만 1억3500만 원이 들었다.

주민대책위 총무를 맡았던 천병원 씨는 당시의 상황을 전하며 간척사업의 어려움과 함께 이를 무릅쓰고도 농토를 간척하려 했던 농민들의 심경에 대해 말했다.

“리어카도 없었고 순전히 지게여. 지게하고 삽밖에 없다고. 옛날에는 60~70년대 얼추까지 리어카도 없는 사람이 많았어. 그렇게 어려웠다고. 1980년도부터 농촌 근대촉진법으로 정부가 길 내고, 도로 내고, 포장하고 해서 지금 살기가 좀 좋게 된 거지. 근데 바닷물이 들어왔다 나갔다 들어왔다 하면 그게 완전히 어느 정도 땅이 굳어. 지금처럼 포크레인이 있으면 좋았겠지만, 옛날에는 순전히 삽으로다 다 막은 거야. 지게로 다 짊어지고 와서…. 그때 내가 총무를 봤거든. 대포리·소반리·내경리 이렇게 세 개 부락하고 관계자 사람들이 한 80명 정도 됐어,”

우현선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