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1919년 3월 서울에서 일어난 독립 만세의 함성은 들불과 같이 전국으로 번졌다. 그 결과 3월 10일부터 4월 13일의 한 달여 기간 동안 당진 전 지역에서도 독립 만세운동이 전개됐다. 3.1운동 104주년을 맞이하여 당진지역 독립 만세운동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고자 김남석 호서고 역사교사의 글을 4회에 걸쳐 연재한다.
<글 싣는 순서>
1. 당진 3.1운동의 시발점
- 서울 3.1운동에 참여한 당진인들
2. 당진인의 문중의식과 독립정신
3. 당진 3.1운동의 유산- 화합과 통합의 정신
4. 당진 3.1운동은 최초 혹은 최대의 독립 만세운동
늘 의문을 품고 있었다. 물론, 지금도 의문점을 풀어내기 위해 애쓰는 중이다. 대호지 정미 독립만세운동의 힘(저력)에 관해서다. 대호지면 조금리에서 발원한 만세운동 행렬은 4월 4일(음 3월 4일), 정미면 천의장터에 집결하였다. 군중은 1천여 명을 웃돌았다. 이들은 장터 한가운데에 태극기를 세우고 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만세운동을 제지하던 일본 경찰이 군중을 향해 발포하자 돌을 던져 몰아냈고, 천의주재소와 정미면사무소 앞에서도 독립 만세를 외쳤다. 격렬했던 만세운동은 해가 기울면서 종료되었지만, 일제 헌병대의 보복은 이때부터 폭압적으로 자행되었다. 헌병대는 가가호호를 검문하며 젊은이를 잡아갔다. 대호지면과 정미면은 일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이렇게 끝날 것 같던 만세운동이었다. 어찌 된 일인가. 4월 8일 저녁, 대호지면 송전리에서 20여 명이 모여 봉화를 올리고 독립 만세를 외쳤다. 뒤이어 조금리에서도 70여 명이 봉화를 올리고 만세를 불렀다. 같은 날 정미면 신시리에서도 300여 명이 독립 만세를 외쳤다. 그리고 밤 10시경, 약 300명의 주민이 수당리의 봉화산 봉화대에 올랐다. 여러 곳에서 피어오르는 불빛과 만세 함성, 그리고 일본 경찰의 총성이 뒤엉켰다. 긴장된 순간, 수당리의 정원환(1864~1939)은 봉화대 아궁이에 불을 붙였다. 이어서 군중과 함께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봉화와 함성은 칠흑 같은 식민지의 어둠을 깨웠고 천지를 진동하였다. 그칠 줄 모르는 이들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주민의식의 저변에는 지역의 행정적 특성도 잠재했을 것이다. 대호지면과 정미면은 조선시대 내내 해미현에 속해 있었다. 다 아는 바와 같이 해미현은 조선시대 병마절도사의 주둔지였고, 병영이 청주로 옮겨간 뒤에는 현감이 영장(營將)을 겸하고 있었다. 해미 현감으로 무관이 부임했고, 일반 행정과 더불어 군사적인 업무를 처리하였다. 천주교인들이 해미에서 박해를 당한 것도 군사적인 특성 때문이다. 해미지역 주민들에게는 병영에서 강조하는 ‘상무정신’이 있었다. 상무정신은 외세배척으로 이어지고, 강력한 항일의식으로 계승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 주민의 항일의식은 행정특성에 더하여 다른 부분도 작용하였다. 바로 문중 정신이다. 그 가운데 몇몇 문중을 소개하면 이렇다. 연안차씨는 대호지면 적서리에 집성촌을 이루며 차천로(1556~1615)의 학문과 사상을 기리는 문원사(文苑祠)를 거점으로 가문의 유대와 결속을 다지고 있다. 전주이씨는 대호지면 송전리에 세워진 이시경 충신 정려를 중심으로 ‘충’의 정신을 배양하고 있다. 이시경(?~1597)은 정유재란 때의 장수로 왜군과 격전 중 전사한 충신이다. 이양원(1526~1592)을 배향하는 문헌묘(文憲廟)도 옆에 있다. 한편, 도이리의 충장사(忠壯祠)는 이곳에 집성촌을 형성한 의령남씨의 정신적 요람이었다. 이들은 도이리에 ‘도호의숙(桃湖義塾)’이라는 학교를 세우고 1905년 유진하(1846~1906)를 초빙하여 ‘민족자존’을 교육했다. 두산리의 부안김씨도 중요하다. 이들도 두산리에 ‘경성재(敬誠齋)’와 ‘계지재(繼止齋)’를 세워 조상을 추모하며 ‘효’ 사상을 강조하고 있다.
정미면 수당리에서는 함평정씨 문중이 주목된다. 조선시대 마지막 유학자 중 한 분인 정재학(1888~1949)이 거처했기 때문이다. 그도 유진하의 제자이면서 동시에 같은 화서학파 문인인 유인석(1842~1915)의 제자였다. 화서학파는 이항로(1792~1868, 호:화서)의 문인(제자)으로, 한말 의병과 독립운동가를 다수 배출한 대표 유림이다. 정재학은 유인석이 항일투쟁을 위해 만주로 갈 때 그 뒤를 따랐으나, 스승 유인석의 만류로 뜻을 접었다. 이때 ‘거의(擧義), 순의(殉義), 수의(守義)’의 3대 의제를 마음에 새겼는데, 후진을 양성하여 미래를 기약하는 ‘수의’의 길을 걷기로 다짐하였고 수당리로 돌아와 제자양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일제강점기 서산과 당진의 한학자들은 거의 이분의 학문을 계승하였다. 그리고 일제강점에 항쟁하는 민족의식을 배양했다. 결국, 당진 3.1운동의 힘은 충효를 존중하는 문중 정신과 화서학파에서 계승된 민족자존의 항일의식이 융합된 결과라 하겠다(존칭 생략은 양해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