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오순도순 가족들이 한 마을에 모여 살았던 과거의 모습은 사라진 지 오래다. 뿔뿔이 전국 각지로 흩어져 사는 데다가 서로 사는 게 바빠 왕래조차 어렵다. 가족의 얼굴도 모르고 사는 시대에, 대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가족애를 나누는 ‘살구나무회’가 있어 눈길을 끈다. 무려 29년째, 단 한 회도 빠지지 않고 계속된 모임이다. 올해 역시 지난 10일 태안 구례포 해수욕장에서 68명의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가족의 보호수 ‘살구나무’
대호지면 송전리에 사는 정익환·손명월 노부부의 집 안뜰에는 가족을 지켜주는 살구나무가 있다. 언제부터 이 집터에 뿌리내린 지 모를 정도로 아주 오래도록 자리한 나무다. 이 나무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이 ‘살구나무회’다. 살구나무회는 정익환 옹(회장)의 7남매의 가족들로 구성된 모임이다. 서로 떨어져서 살면서 얼굴 보기 힘들 자, 맏형인 정익환 옹은 1년에 한 번이라도 가족이 모일 수 있는 자리를 제안한다. 그 뜻에 나머지 6명의 남매가 동의했고, 인근 서산에서 첫 모임을 가졌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어느덧 올해로 29년이 됐다. 처음 45인승 버스를 빌려 한 차로 이동했던 것과 달리 지금은 한 번 모이면 70여 명에 이를 정도다. 7남매의 자녀들은 물론, 그 자녀의 자녀까지 찾아 말 그대로 대가족을 이뤘다.

세대가 함께 만들어 가는 가족 모임
이렇게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사이 좋게 모임이 이뤄질 수 있었던 비결이 있었다. 한 가지는 ‘함께 만들어 가는’ 모임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살구나무 가족의 규칙이 존재한다. 우선 회비가 있다. 회비는 연에 10만 원인데, 결혼하고 1년 뒤부터 내면 된다. 결혼 후 바로 회비를 내는 게 아닌, 1년의 유예 기간을 둔 것은 우선 가정을 잘 꾸리라는 뜻에서다.
회비를 관리하는 것은 총무다. 1세대 총무는 7남매 중 여섯째인 정능환 씨다. 지금까지 29년 동안 총무를 맡아 오면서 가족 회원들과 회비를 관리해 왔다. 또 업무를 각 가정에 배정하고, 행사가 끝난 후에는 정산까지 깔끔하게 한다.
“식판 정리는 자기 스스로 해요”
문자를 통해 날짜와 장소가 공지되면, 가족이 모이기 며칠 전부터 모두들 같이 분주해진다. 배정 받은 음식이나 물품을 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몇몇은 일찍이 모임이 있는 곳을 찾아 가족들이 시원하게 쉴 수 있도록 그늘막을 설치하고, 또 몇몇은 준비한 음식들을 가져온다. 가족들이 배불리 먹을 수 있도록 미리 맞춘 밥과 떡, 치킨에 과일과 간식까지 착착 준비된다.
올해 모임에는 재미까지 더해졌다. 다섯째의 막내딸이 프로그램을 구성했는데, 보물찾기부터 수박 빨리 먹기, 가족 대표 가위바위보까지 진행돼 웃음을 한가득 나눴다.
한참 놀고 정리하는 일도 같이 한다. 적지 않은 인원이기에 식사를 마치고 치우는 일도 쉽지 않다. 거기다 사용한 일회용품도 만만치 않다. 그래서 살구나무회는 일찍이 식판을 구매했다. 가족들이 준비한 음식을 펼치면 식판에 자기가 먹을 양을 스스로 가져온다. 식사를 마친 후에는 각자 먹은 식판을 설거지하는 순으로 진행된다.
한바탕 웃고 함께 맛있는 음식을 먹고, 놀고 난 다음에는 단체 사진으로 추억을 남긴다.

일찍이 떠난 부모님, 두터워진 가족애
한편, 7남매의 우애가 끈끈한 데는 이유가 있다. 첫째 정익환 옹은 결혼식을 올린 지 2주 만에 군대에 입대하게 된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군대에서 어머니가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연이어 아버지의 비보도 전달 받는다. 그때 막내동생의 나이는 고작 4살이었다. 정 옹은 “동생들이 부모 없이 자랐다는 소리 듣지 않게끔 나름대로 열심히 뒷바라지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았다”고 말했다. 둘째 정영옥 씨는 “오빠가 없을 때 언니(손명월)가 우리 남매들의 엄마 노릇을 하며 고생을 많이 했다”고 말했다. 첫째 정 옹은 제대 후에 세상을 떠난 아버지를 이어 동생들과 농사를 지어 가면서 가족을 지켰고 이때의 가족애가 지금까지 이어졌다.

100번 가족에게는 100만 원의 상금을
한편 살구나무회의 회원에게는 숫자가 부여된다. 1번인 첫째 정 옹을 시작으로 막내 남동생의 딸이 올해 10월에 출산하면, 그 아이가 99번이 될 예정이다. 여기에 살구나무회는 100번이 되는 가족에게 상금 100만 원을 주기로 했단다. 아마 100번은 내년 5월에 결혼해서 가족이 되는 예비 사위에게 주어질 예정이다. 이 예비 사위는 이번 모임에도 함께 했다.
1번 정 옹의 소원은 100번을 지나 200번의 가족이 함께 할 때까지 모임이 계속해 이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모이면 함께 부를 수 있는 가족 노래도 만드는 것이 남은 바람이라고 전했다. 그는 “가족들이 모이면 함께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어 둘째인 정영옥 씨는 “내 몸이 허락할 때까지는 지금처럼 열심히 모임이 이어질 수 있도록 가족들을 돕고 싶다”는 말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