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서진 철파이프 7개월간 용접해 우뚝 세운 육계장

“희망은 젊다는 것 한가지였다

다시 그날이 온다면 정말 자신없다”

폭설의 악몽, 2001년 새해 벽두

정미면 수당리에 사는 정순호(45)씨는 온 세상을 하얗게 뒤덮은 눈을 보았다. 세상은 그야말로 설국 그 자체였다.

그러나 집 위아래에 있는 비닐하우스를 보는 순간 정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1만2천평에 이르는 비닐하우스 여섯동이 흔적도 없이 주저앉아 버렸던 것이다.

눈은 결코 아름답지 않았다. 그저 끔찍하기 이를 데 없는 재난이었다.

이웃에 사는 후배 한사람은 좌절 끝에 끝내 죽음을 택했다. 정순호씨는 그 사람의 심정을 충분히 얼마든지 이해할 수 있었다.

그로부터 1년간 정순호씨는 지금까지 살면서 겪은 어려움 중에서도 가장 힘겹고 어두운 고통의 터널을 지나왔다.

정부로부터 시설하우스 육성자금 2억을 융자받아 어렵사리 버섯과 꽈리고추 재배를 시작한 게 96년이었으니까 만 4년도 채 안되는 때였다. 이자상환은 고사하고 원금도 잔뜩 남아있던 터에 덮친 갑작스런 재난은 정씨의 의욕을 꺾어버리기에 충분했다. 차라리 아무것도 없다면 모를까 억대의 빚을 안고는 도무지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런데 정씨가 이토록 좌절한 데에는 사실 남다른 사연이 있었다. 하우스를 시작하던 4년 전에도 그것은 정씨에게 ‘재기’를 의미하는 중요한 시작이었던 것이다.

94년과 95년 2년에 걸쳐 당진군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미면 수당리 공원묘지 사건을 기억한다면 그때 마을주민들을 이끌었던 젊은 지도자 정순호씨를 기억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마을의 산과 논이 공원묘지 때문에 홀라당 헐리게 생겼던 그때에 새마을지도자라는 마을의 중책을 맡아 마을주민들을 설득하고 하나가 되게 이끌던 그의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정열과 헌신 그것이었다. 며칠째 단식으로 수척해진 가운데서도 머리띠 질끈 동여매고, 찾아온 마을주민들과 대책을 숙의하던 모습은 구경꾼일 뿐이었던 기자의 마음까지 숙연하게 했었다. 게다가 지쳐서 쉰 목소리에 담긴 억양이 여전히 단단했던 것과 그 눈매가 더욱 결연했던 것도 잊을 수 없는 풍경이었다. 당시 우리를 가장 바쁘게 했던 취재거리도 바로 그 일이었다.

95년 봄, 급기야 100가구가 넘는 마을주민들은 일제히 “공원묘지 결사반대, 농사포기”라는 극단의 방법을 선택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애를 태우며 눈시울을 적셨다. 모내기 시기를 지나고도 텅빈 그 마을의 논을 보면서 사람들은 안타까워 하긴 했어도 그들을 비난하지는 못했다. 보다 못한 당진군청의 이수 산업과장과 군내 농업경영인들이 뒤늦게 마을주민을 대신해 모내기에 뛰어들었던 일은 전설같은 이야기로 남아있다.

2년에 걸친 필사적인 싸움으로 공원묘지 계획은 철수됐지만 주민들에게는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2년여의 삶의 공백을 메워야 한다는 숙제가 앞에 놓여 있었다. 정순호씨의 비닐하우스는 그런 ‘재기’로서 세워진 것이었다. 여차하면 겪지 않았어도 되었을 지친 싸움, 그로 인해 얻은 몸과 마음의 고단함. 모처럼 훌훌 털고 다시 시작해 보자고 뛰어든 하우스 농사였는데 그것이 하루 아침에 무너져 내린 광경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고통스러운 것은 그 뒤였다. 어디서부터, 무엇을, 어떻게 해야할 지 막막할 뿐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던 정순호씨가 말했다. “정말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운 1년이었다”고.

그날로부터 꼭 1년이 지난 2002년 1월

정씨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누가 그러대요, 참고 견디면서 열심히 살다보면 언젠가 고통의 시간이 다 지나간다고요. 그때까지 견디는 게 문제라고요. 정말 그런 것 같더라고요. 그걸 위안 삼고 살았죠.”

정말 그래 보였다. 지금 정순호씨가 서있는 지점은 터널을 막 벗어나는 곳인 것 같았다.

하우스의 잔해가 처참했던 그 자리에 하우스 대신 튼튼하게 서있는 커다란 육계장들이 그걸 말해준다. 병아리와 닭 6만마리가 다섯동의 육계장에서 삐약거리고 퍼덕거리고 있었다.

폭설 당시 피해농민 대표중 한 사람으로 보상을 위해 여기 저기 뛰어다니며 심지어 국회까지 가보았던 정순호씨는 결코 정치인이나 정부의 관료에게 자신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말은 그럴 듯하게 했지만 그것이 말뿐이라는 걸 깨달으면서 정씨는 서글픔을 억누를 수 없었다.

“누구한테 하소연할 수도 없고… 비록 자연재해이긴 했지만 저 자신이 무척 부끄러워 지대요.”

그런데 길은 엉뚱하게도 더 가까운 데에 있었다. 그때 농민피해보상을 위해 서울, 대전 등지를 같이 오가던 합덕의 모씨로부터 육계에 대한 정보를 듣게 된 것이다. 연간 조수익이 하우스 소득보다 높고 일손이 필요할 때 300~400명분의 밥을 끓여대지 않아도 되는 일이었다.

정씨는 과감하게 하우스 농사를 포기하기로 했다. 힘든 결정이었다. 성패를 떠나 어쩌면 마지막 선택일 수도 있었기 때문에 부인 유명옥(42)씨도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정씨가 들이미는 계산서를 보고는 남편의 결정을 따라주었다. 그것은 무엇보다 성실하고 책임있는 남편에 대한 신뢰 덕분이었다.

다행히 고난중에 만난 모씨의 도움으로 목우촌과의 육계계약도 성사가 되었다.

문제는 시설이었다. 정씨는 고철쓰레기가 되어버린 하우스 시설을 재활용하기 위해 일일이 파이프 하나하나를 펴고 용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일이 6개월이 넘게 걸릴 줄은 미처 몰랐다. 밥만 먹으면 무너진 하우스 자리에 나가 철파이프와 싸우다 보니 어느 새 9월이었다.

“나중에서야 내가 어리석었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업종을 바꾸면 시설비 지원이 안됐기 때문에 그걸 아끼려고 미련을 떤 거죠. 차라리 고철더미를 일찌감치 처분하고 새로 시설을 했더라면 오히려 시간과 노력을 아끼고 한번이라도 닭을 더 뺄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

말이 그렇지, 그때 심정으로야 어떻게 그 많은 하우스 파이프를 내다 버릴 수 있었겠는가 싶다.

11월말에 처음 다 자란 닭을 빼고 7일만에 돈을 손에 쥐었을 때 이제야 고통의 시간이 지나가나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화 시설이 되긴 했지만 세심한 보살핌이 필요한 까닭에 정씨는 세시간마다 육계장을 한바퀴 돌며 점검을 해야한다. 잠이 부족하긴 하지만 그쯤은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스물여덟에 마을지도자를 맡아 어느 새 하얗게 새어버린 머리카락을 보면 스스로 “참 파란만장하게 살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작년만 해도 젊었으니 다행이죠. 희망은 젊다는 거 한가지밖에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일이 또 일어난다면 다시는 자신이 없어요.”

이것이 정씨의 솔직한 심정이다. 정순호씨의 기억은 7년전 공원묘지사건에서 잠시 머문다.

“아마 오랫동안 잊을 수 없을 겁니다. 그때 마을문제를 여론화해준 당진시대와 정말 농심이 되어 도와주었던 이수 과장님, 그리고 농업경영인회의 도움을 말입니다.”

김태숙 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