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론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야 잠깐에 지나지
-않았지만 표정없는 얼굴은 여전했다.
-그런데 다음순간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 “고맙습니다”라고 내뱉는 목소리가
-뜻밖에도 여자의 것이 아닌가.
그리하여 우리는 슬금슬금 그쪽으로 다가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앉아서 바다를 구경하는 척 사내를 살폈다. 사내는 이쪽 저쪽 바다를 향하여 연신 절을 올리고 무슨 주문인가를 외우기도 했다. 점차 어두워지는 바다와 바람에 펄럭이는 잿빛 승복과 단조롭게 울려대는 목탁소리가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게 하고 있었다. 슬픈 듯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뭔가 음산하다고 할까. 아무튼 얼마 후 소위 ‘고수레’를 하는 것으로 사내는 제를 끝냈다. 음식을 바다 이쪽 저쪽을 향해 던지고 술을 조금씩 뿌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술병속의 술을 마지막 한방울까지 마저 쏟아부었을 때, 술 한잔 얻어 마시며 이야기를 붙여볼까 했던 내 생각이 틀려버렸구나 싶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더 좋은 기회가 다시 찾아왔다고나 할까. 제를 마친 사내는 이것저것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잿빛 승복을 벗으니 그속에서 한복 바지저고리 차림이 나왔는데, 벗은 승복을 잘 개켜 가방 속에 집어넣고, 남은 북어포와 과일 등을 비닐 봉지에 집어넣었다. 그런데 마침 불어오는 바람에 비닐봉지가 날려와 우리가 앉아 있는 벤취에 척 걸리는 게 아닌가. 바로 이것이다 싶어 얼른 비닐봉지를 집어들었다. 그리고는 사내에게 다가가 그것을 건네었다. 사내가 비닐봉지를 받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무엇인가 말을 건네려던 나는 그 순간 서늘한 것이 등줄을 훑으며 호흡이 멈춰지는 것을 느꼈다. 표정없는 얼굴에 눈빛이 예사롭지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물론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야 잠깐에 지나지 않았지만 표정없는 얼굴은 여전했다. 그런데 다음순간 나는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맙습니다”라고 내뱉는 목소리가 뜻밖에도 여자의 것이 아닌가. 전체적으로 조그만 체구의 남자같은 모습이었으나 목젓이 없고 젖무덤이 솟아오른 것이 남장여자였던 것이다. 하지마 그 ‘남장’은 나의 놀람 같은 것에는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고맙다는 그 한마디만 했을 뿐 더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고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짐을 챙기기만 할 따름이었다.
나는 슬금슬금 물러나와 내 여자에게 “저 사람, 남장 여자야”라고 말하고는 뭔가 음산한 기분을 떨치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지켜보기만 했다. ‘남장’은 휘여휘여 짐을 챙기더니 다시한번 바다를 향해 절을 올리고는 우리의 앞을 지나 방파제를 빠져나갔다. 우리의 앞을 지나치면서도 남장은 눈길을 주지 않았고 뭔가 서늘하고도 무표정한 얼굴인 채였다. 그리고 느린 걸음이다 싶은데 어느새 방파제를 다 빠져나가 우리가 첫날 묵었던 민박집 쪽의 길로 올라가고 있는 것이었고, 또한 잠시 한눈을 팔다 보니 금새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대체 저 남장은 무슨 사연이 있는 것인가? 그저 단순한 무속인에 지나지 않을까? 또한 이곳 주민도 아닌 것 같은데 이번 배로도 나가지 않고 방파제 끝에 망연히 앉아 망망한 바다 저편을 바라보고 있는 것은 무슨 연유에서일까? 남장을 생각하면 뭔가 음산하고 칙칙한 기분이면서도 자꾸만 그런 의문이 떨쳐지지가 않았다.
여객선에서 내린 손님을 받아 실은 배가 들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다시 선착장으로 내려섰다. 다행히 아니, 다행이랄 것 까지는 없겠지만 민박집 여주인인 챙모자는 보이지 않았다. 배가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목을 길게 빼고 처남부부를 찾았다. 하지만 오히려 처남부부가 우리를 먼저 발견하고 손을 흔들며 우리를 향해 카메라 셔터를 눌러댔다. 동심(童心)이 따로 있을까. 우리는 다 같이 어린애가 되어 이쪽에서 저쪽에서 서로를 부르며 소리를 질러댔다.
배가 접안을 하고 승객들이 내리기 시작했다. 처남부부가 우리 쪽으로 내려서며 말했다.
“야. 웬 홍도냐, 홍도가? 이미 장마권에 접어들었다는데.”
“형님, 장마는 무슨 장맙니까.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그리고 설혹 장마라 해도 장마비 때문에 배가 안 뜨는 것은 아니잖습니까. 풍랑이 일어야 배가 못뜨는 것이지.”
“그려 그려. 비 때문에 배가 안 뜨는 것이 아니고 풍랑이 일어야 못뜨는 것이지. 까짓 비가 오면 어떠냐, 풍랑만 일지 않으면 되는 것이지. 어쨌든 잘됐다. 자네들 때문에 말로만 듣던 홍도에를 다 와보고. 우리가 자주 여행을 다녀서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가보지 않은 곳이 없지만 홍도는 처음이란 말씀이야. 아무튼 우리 부부를 이렇게 초대해 줘서 고마워.”
원래가 낙천적이고 사람 좋은 처남이었다. 거기다가 부부는 닮는다고 처남댁 역시 마찬가지여서 사서 걱정하는 일 같은 건 없었다. 곧 장마가 시작된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던 것이다.
배에서 내린 사람들은 스무명이나 될까 하는 비구니들이 무리지어 있다는 게 특색이라면 특색이랄까 싶었을 뿐 평시와 다름없이 많은 관광객들을 싣고 왔다. 그러나, 우리가 올 때 보다는 훨씬 적은 숫자였다. 우리는 그렇게 관광객의 숫자가 적은 것이 장마 때문이라는 것을 미처 생각지 못했고 또한 무시하고 있었다.
2. 네째날
오늘은 배가 뜨지 못하리라는 것을 나는 눈을 뜨면서부터 알았다. 어제 오후 반나절까지만 하더라도 괜찮았던 날씨가 날이 저물기 시작하면서부터 간간이 비 뿌리고 바람이 부는 등 심상치가 않았었다. 그러던 것이 밤이 깊어지면서는 빗줄기가 굵어지고 바람이 거세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밤새 파도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고 창문이 요란스레 덜컹거려 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다. 몇번 잠에서 깨어나다가 안되겠다 싶어 화장지를 움켜 창문틈 사이사이에 끼워넣고서야 겨우 잠을 이룰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