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휴게소지만 불과 몇십 년 전만 해도 섬마을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울려 퍼지던 행담도. 섬이다 보니 교육의 여건도 미처 닿지 못했던 곳이었다. 인근에 한정초가 있었지만, 배를 타야만 닿을 수 있었기 때문에 등하교가 쉽지 않았다.
그 공백을 메우기 위해 1961년 3월 1일, 한정초등학교 행담분실이 문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 첫발을 내디딘 스승은 겨우 열아홉 살의 청년, 강전항 선생님이었다. 그리고 그에게 배움을 받은 첫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이 한정만 씨였다.
지난 17일, 세월의 강을 건너 60년 만에 다시 만난 스승과 제자는 뜨겁게 부둥켜안으며 지난날을 추억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사범학교를 졸업한 강전항 선생님은 19살의 나이에 한정초등학교에 부임했다. 바다 건너에 있는 작은 섬 행담도에 교육이 닿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그는 서슴없이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승진 가산점이 주어지는 지금과 달리, 당시 도서벽지 근무에는 어떤 혜택도 없었다. 학교조차 제대로 없는 곳에 청년 초임 교사가 간다는 말에 교장도 말렸지만, 그는 뜻을 굽히지 않았다. 노를 젓는 작은 배에 교육의 열정과 몸을 싣고 도착한 행담도. 하지만 맞닥뜨린 현실은 열악했다.
교실조차 없었던 탓에 그는 주민 임은순 씨의 사랑방에 기거하며, 3평 남짓한 공간에서 주워온 칠판 하나 걸고 15명의 아이를 가르쳤다. 수업 시간은 시계가 아닌 조수간만의 차에 맞춰 정해졌다. 물이 빠지면 아이들은 굴을 캐고 낙지를 잡으러 갯벌에 나갔다. 물이 들어오는 시간에야 비로소 공부가 시작됐다. 강전항 선생님 역시 아이들에게 굴 캐는 법을 배웠다고.

학교를 세운 스승
강전항 선생님은 사랑방 교실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교육청을 찾아가 학교 교실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직접 나서 주민들과 흙벽돌을 만들었다. 또한 서울의 한 여성단체에서 보내온 함석으로 지붕을 덮을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건물을 쌓기도 전에, 비바람에 무너져 내리는 흙벽돌을 보며 속을 태워야만 했다. 하지만 그의 노력이 닿은 덕인지, 교육청에서도 학교 시설을 건립할 수 있도록 도움을 줬다.
행담분교의 터 또한 그가 정했다. 구양도에서 인천을 지나는 여객선이 잘 보이면서도 양지바른 곳을 찾아다녔다. 그는 그 자리에 교실을 세우고 감독까지 맡으며 ‘섬의 학교’를 현실로 만들어냈다. 제자 한정만 씨는 “학교 세우려고 노력한 행담분교의 초대 선생님”이라며 그 은혜를 잊지 못했다.
교사 그 이상의 존재
당시 강전항 선생님은 단순히 가르치는 스승에 머무르지 않았다. 학용품이 없는 아이들을 위해 박을 심어 수확하고 속을 파내 바가지를 만들었다. 또 깨도 심고 수확해, 이것들을 팔아 교육비를 마련했다.
여기에 거친 말을 쓰던 아이들에게 ‘바른말 쓰기 운동’을 벌였고, 글을 모르는 주민에게는 편지를 대신 읽어주고 써주었으며, 제사 때는 축 지방을 직접 써주기도 했다. 새마을운동이 있기도 전에 스스로 새마을운동을 했던 것이다. 그는 “가르치는 것을 떠나 마을의 한 식구였다”는 그의 말처럼, 행담분교와 강전항 선생님은 학교와 선생님이 아닌 마을의 희망이었다.
눈물의 이별, 잊지 못한 스승과 제자
그러나 행복했던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강전항 선생님이 행담도에 온 지 2년이 지났을 무렵, 그에게 입영 통지서가 날아왔다. 섬을 떠나는 날, 아이들과 주민들은 바닷가로 몰려왔다. 그때 한 학생이 애국가를 부르기 시작했고, 모두가 따라 불렀다. 스승과 제자는 물론 주민까지 눈물을 흘리며 배웅했다고.
군대에 간 그를 잊지 못하는 제자의 편지도 도착했다. 제자 한정만 씨의 누나, 한정순 씨가 보낸 안부 편지였다. 강전항 선생님 역시도 제자를 잊을 수 없었다. 전역 후 다시 행담도로 가고 싶었지만, 그 사이에 도서벽지 가산점 제도가 생겨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돌아갈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늘 행담도를 그리워했다. 송악초등학교에 이어 여의도초등학교에서 근무하면서도 행담도를 찾았을 정도였다.
50년, 반세기 동안 간직한 원고
강전항 선생님은 행담도를 떠나고 나서도 섬 생활을 잊지 못했다. 그리운 행담도, 그리고 주민과 제자들을 생각하며 30대에 '가치네 선생님'이라는 제목으로 200자 원고지 50매의 글을 써내려갔다. 강 선생님은 수많은 학교에서 근무했지만 이렇게 논픽션의 글을 적어놓은 것은 행담도가 유일하다고. 반세기의 세월이 느껴지는 짙은 황토색 원고지에는 당시의 행담도에 대한 그리움도 진하게 담겨있다.
60년 만의 재회
그리고 마침내, 지난 17일. 당진시대가 진행한 공간스토리텔링 프로젝트 ‘행담의 추억’ 취재가 그들을 이어주었다. 안라미 충남콘텐츠연구소 지음협동조합PD의 연락으로 두 사람이 당진시대 신문사에서 60년 만에 만날 수 있었다.
서울에서 온 강전항 선생님, 대전에서 달려 온 제자 한정만 씨, 그리고 사랑방을 내주었던 임은순 씨가 한자리에 모였다. 한정만 씨는 그리웠던 선생님을 보는 순간 눈물을 글썽이며 큰절을 올렸다. 그리고 미리 준비한 꽃을 선생님의 가슴에 달아드렸다. 그는 “며칠 동안 잠도 설쳤다”며 “만나는 날에도 새벽 4시에 깼다”며 60년 전, 7살이었던 그때 어린아이처럼 설레는 얼굴로 말했다. 임은순 씨도 “그때 그 집 할머니”라며 자신을 알리면서 “이렇게 살아 있으니 만날 수 있게 됐다”고 반가움을 전했다.
이들은 시간 가는 줄 모른 채 옛이야기를 나눴다. 어린 한정만 학생이 어머니가 쥐여 준 용돈으로 자기 것을 사지 않고 선생님께 풍년초 담배와 작은 장난감을 사드렸던 이야기, 선생님을 떠나보냈을 때 등. 한정만 씨는 당시를 떠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선생님과 나이 차이가 커 보이지 않지만, 그때 나는 7살, 선생님은 19살로, 마치 큰 어른 같았어요. 가뜩이나 지식도 없는데 가르쳐도 주시니 마치 하나님과 같은 존재였죠.”
가치내 선생님의 바람
이날 만남에서 강전항 선생님은 당진시대와 지음협동조합에 “행담도의 뿌리를 찾아 남겨 줘 고맙다”며 “40여 년 교단에 있으면서도, 그리고 지금까지 잊지 못하는 것이 ‘가치내 선생’이라 불렸던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행담도 휴게소를 지날 때마다 지금도 행담분교 이야기를 한다”며 “오늘이 너무 감개무량하다”고 말했다. 덧붙여 “보지 못한 제자들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가정을 이루며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