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였던 당진은 삽교호방조제를 시작으로 대호.석문방조제가 잇따라 축조되고 각종 매립공사가 진행되면서 천혜의 어장이었던 갯벌이 사라지고 섬도 파괴되거나 연육되었다.

당진군내에는 간척사업이 진행되기전 20여개의 유.무인도와 몇몇 이름없는 섬이 있었으나 초락도, 도비도가 대호방조제 공사로, 송악면에 있는 내도는 한보철강 매립공사로 육지가 되었다. 가장 최근엔 아산만에 떠있는 유일한 섬인 행담도가 서해대교 공사를 위해 가교가 놓여지면서 연육되어 현재 당진에는 석문면 관할인 난지도리에 모두 8개의 유.무인도만이 존재하고 있다. 대난지도, 소난지도, 대조도엔 사람이 살고 있으며 소조도, 우무도, 비경도, 분도, 철도 등은 무인도이다.

개발과 산업화의 위력에 불안한 미래

-대난지도(大蘭芝島)-

2년전만해도 석문면 최북단의 섬 대난지도에 가려면 대산 삼길포에서 배를 타야 했다. 이제는 대호방조제 축조로 육지가 된 도비도에 선착장이 생겨 그곳에서 하루 세차례 운행되는 17톤급 여객선 난지호를 타면 20분만에 섬에 닿을 수 있다. 도비도 선착장에서 바라보면 맨앞에 대조도가 바로 옆에 소조도가 있고 우무도를 지나 소난지도, 소난지도에서 1km를 더 가면 대난지도이다.

70세대 196명이 살고 있는 대난지도는 면적이 1백50여만평으로 당진에서 제일 큰 섬이자 신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는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주민들은 이곳에서 바다를 막아 염전을 만들고 또 논을 만들어 벼농사를 짓고 비탈진 밭에는 채소등을 가꿔 식량으로 삼고 있다.

11월 10일, 가을걷이를 모두 끝낸 대난지도는 조용하고 평화로와 보였다. 커다란 가마솥에 불을 지펴 메주를 만들고 있는 할머니, 금방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은 토담집에 무엇에 쓰려는지 큰 나무기둥을 매달고 있는 할아버지, 정성들여 수확한 벼를 말리고 있는 아저씨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이맘때 쯤이면 흔히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 굴을 따거나 바지락을 캐는 아낙들의 모습은 좀체로 보이지 않았다. 서산이 고향이라는 70대 할머니 두분이 오전내내 낙지 두마리밖에 못잡았다며 말을 건네온 게 전부다.

그것이 대난지도의 현실이었다. 지금 대난지도 주민들은 중요한 생계수단이었던 어업을 잃고 불안한 가운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대난지 해수욕장에서 지척에 보이는 석유화학공단 대산3사가 들어온 뒤로부터 주민들은 해마다 줄어드는 굴 채취량과 썩어 문드러지는 해태를 보아야 했던 것이다. 개발과 산업화의 위력은 오로지 자연의 섭리에 의존해 살아오던 섬주민들에겐 ‘생태계 파괴’라는 재앙으로 닥쳐온 것이다.

지금 난지도 주민들은 여름 한철 해수욕장을 찾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방갈로를 임대해 주거나 상가와 식당을 운영해 얻는 수익으로 근근히 살아가고 있다.

난초와 지초가 많아 난지도

난지도(蘭芝島)는 원래 난지도(難知島)라 불려졌다고 한다. 이는 인접한 옹진군 대부면 풍도와 난지도 사이의 물살이 거세 배가 다니기 어려워 붙여진 이름이라는데 언제부터인가 난지도(蘭芝島)로 바뀌게 되었다.

섬주민들은 난초와 지초가 많아 그렇게 이름 붙여졌다고 말하는데 실제로 난지도에는 출난이나 원추리난등 야생난이 많이 서식하고 있었으며 특히 지초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60년대 대난지 아이들이 홍역을 심하게 앓았는데 그때 지초를 약으로 쓰기 위해 다려 먹이는 바람에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는 것이다.

과거 대난지 주민들의 생업은 목선(풍선)을 이용해 땔감으로 쓰이던 엽송을 육지로 실어 나르거나 전라도 곡창지대에서 사들인 쌀을 서울로 운반해 거둬들이는 운임료로 식량을 구해 먹고 살았다. 말하자면 해운업에 종사했던 셈이다.

대난지도는 소난지도와 함께 좋은 포구를 갖고 있어 조선시대에는 조세미를 싣고 서울 향하던 세곡선들이 소난지 포구가 만원일 때에는 대난지 포구에 배를 접안시켰다고 한다.

난지포구가 과거 양항이었다는 사실은 차석기(고대면 슬항리)씨가 1989년 편집한 ‘풍도리지’의 풍도민요 한편에서 엿볼 수 있다.

네가 잘나서 일색이냐

낸들 으려서 일색이냐

풍도라 생길라면 석시나 있구

난지라 생길라면 석시나 없지

삼사월에 오는 배가

난지로 쫓겨가네

(석시:풍랑을 피할 수 있는 포구)

전라도 곡창지대로 조세미를 실러나간 남편이 몇달만에 돌아와도 폭풍우를 피할 포구가 풍도에는 없고 난지도에만 있어 기항하지 못하고 다시 난지도로 들어가는 광경을 목격한 풍도 아낙들이 안타까운 심정에서 부르던 민요라 한다.(밝아오는 석문 1991. 재인용)

대난지도에 이처럼 세곡선이 자주 왕래하자 세곡을 터는 도둑들이 숨어있었다는 도둑산과 도둑어미가 대난지 북동쪽 해안가에 위치해 있는데 그 모양새가 위에서 내려다 보아도 보이지 않고 아래에서 올려다 보아도 보이지 않아 몸을 숨기기에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대난지도 주민들의 생활은 일제시대 총독부가 포구에 제방을 만들면서 변화를 겪는다. 농사지을 간척지가 생기고 이후 염전이 생기면서, 또 육상교통이 발달하면서 해운업은 자취를 감추었다. 배를 접안시킬 포구가 없어진 것도 한 요인이다.

이때부터 주민들은 쌀을 생산해 식량으로 삼았고 굴과 바지락 채취가 짭짤한 부소득원이 되어주었다. 그리고 지난 79년 처음으로 해태 양식기술이 도입되면서 궁핍했던 섬주민들의 생활도 피기 시작했다. 바로 그 때가 대난지도가 가장 살기좋았을 때라고 한다.

한 겨울 매서운 바다바람에 손등이 터지고 피부가 갈라져도 부지런히 일하면 자식들 교육비는 걱정 없었기에 주민들은 신명나게 일을 했다. 육지에서 농사 지어서는 못가르치는 대학을 섬에선 해태양식으로 가르칠 수 있었던 것이다.

굴 생산량도 가히 기록적이어서 아낙네들은 하루 8~9kg은 족히 수확해 인천으로 향하는 배에 하루 몇차례씩 실어 보내곤 했다.

그러나 이 좋은 시절은 10년에 불과했다. 89년 대산 가로림만 일대를 매립해 삼성종합화학, 현대정유(극동정유), 현대석유화학등 굴지의 석유화학 회사들이 들어오면서 난지도는 심각한 해양오염에 대책없이 노출되었던 것이다.

용이 살았다는 용못

가시연꽃의 질긴 생명력

이곳 대난지도에 학교가 생긴 것은 1949년도 였다. 삼봉국민학교 난지분교장으로 개장해 1968년 난지국민학교로 승격됐다. 그 당시 학생수는 1백여명을 넘었다고 한다. 그러나 어촌의 쇠퇴와 함께 학생수도 점차 줄어 1984년 삼봉국민학교 난지분교장으로 다시 통폐합되었다.

현재 이 학교에는 소난지도에서 다니는 3학년 학생과 내년에 인천에 있는 중학교에 입학할 6학년 학생등 두명이 남아있을 뿐이다.

올초까지 모두 5명의 학생이 있었으나 난지도 학생들의 학군은 인천으로 되어있어 당진으로 진학하려면 졸업전에 미리 전학을 해야하기 때문에 3명의 학생이 육지의 학교로 옮겨갔다.

이곳에서 1년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는 정용기 교사는 어쩌면 올해가 난지분교장의 마지막 해가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예감에 6학년 홍성표 학생과 섬의 역사와 생활상을 연구하고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 학교에는 학교터를 정지할 때 발견된 하마석(下馬石)이 있다. 자연석에 하마라 새겨진 윗부분의 돌만 있고 아래부분은 파손되었다. 하마비란 조선시대 성현의 탄생지 및 문묘앞에 세워 지나가는 사람으로 하여금 말에서 내려 경의를 표하게 하기 위해 세워 놓았다는 것으로 난지도의 하마석은 먼 옛날 이곳에 중국 사신들이 기거하던 객사가 있었다는 주민들의 말에 비추어 볼 때 같은 의미로 세워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학교가 위치한 마을의 이름도 ‘말을 먹이던 골’이라는 뜻으로 말막금이라 불린다.

학교에서 고개 하나를 넘으면 당진유일의 해수욕장인 난지도해수욕장이 있다. 반달모양의 2km의 백사장을 둘러싸고 해송과 아카시아, 오리목나무가 심어져 있고 붉게 피는 해당화가 집단서식하고 있다.

이곳 해수욕장은 지난해부터 여름 피서철 행락인파가 늘기 시작해 난지도 주민들에게 그나마 위안이 되어주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대산3사의 공해로부터 늘 위협을 받고 있어 특별한 대책이 없는 한 그 미래를 장담할 수 없는 실정이다.

해수욕장 배후에는 용이 살았다는 용못이 있는데 지금은 모래로 메워져 있어 연못이라기 보다는 평지에 가깝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에서도 얼마전 이곳에 희귀식물인 가시연꽃이 오랫만에 피어나 각계의 관심을 모았으며 그 질긴 생명력에 섬주민들은 찬사를 보내기도 했다.

변화의 기로에 선 대난지도

대난지도는 지금 변화의 기로에 서 있다. 그것은 곧 생존이냐 섬을 등지느냐의 원하지 않았던 선택의 순간이기도 하다. 이곳에서는 더이상 어업에 기대를 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어족자원이 소멸됐거나 감소추세에 있으며 해태양식이 좀처럼 되지 않기 시작한 지도 어언 10여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설상가상으로 교로리에 화력발전소가 들어오면서 그 미래는 더욱더 불투명해지고 있다. 아직 매듭지어지지 않은 발전소의 보상관계로 주민들은 수협빚을 얻어 되지도 않는 해태양식을 계속 시도하고 있다. 생산활동의 근거가 있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만난 한 아주머니는 “그 때문에 난지도 사람 모두가 수협에 몇천만원씩 빚을 지고 있다”고 한탄했다.

영구적인 생계대책이 아닌 일회적인 위로금 지급차원에 그치는 보상정책의 맹점을 그대로 드러내주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난지도 주민들은 얼마전 대산3사와의 5년이 넘는 환경분쟁 끝에 3억6천만원의 피해보상금을 받기로 하고 분쟁을 마무리했다. 1가구당 겨우 3백만원이 돌아가게 된 것이다. 주민들이 요구한 것은 28억이었다. 대산3사에서는 어느 회사의 탓인지 정확히 대라며 윽박 질렀고 법도 그 무엇도 주민들 편에는 없었다.

관광어촌의 꿈만이 유일한 돌파구가 될 수 있을까. 섬에서 만난 주민들은 한결같이 “국밥이라도 팔아서 생계를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세곡선이 정박하던 천혜의 포구

-소난지도(小蘭芝島)-

도비도 선착장에서 뱃길로 4km. 여객선 난지호는 대난지도에 닿기 앞서 소난지도를 먼저 들른다. 대난지도 남쪽에 있는 80여만평의 섬 소난지도.

여느 섬과 마찬가지로 조용하고 한적하지만 한때는 조선 최고의 포구로 명성이 높았던 섬이다. 섬 윗쪽으로는 대난지도가, 아랫쪽으로는 우무도와 분도가 바닷바람을 막아주는 천혜의 지형적인 조건으로 조선시대 삼남지방에서 거두어들인 세곡을 서울 마포 경창으로 운반하던 배들이 풍랑을 피해 자주 이곳에 정박을 했다 한다.

육상교통이 중심인 오늘날에 빗대어 말하자면 옛 소난지도는 지금의 대전과 같은 역할을 했다는 것이다. 정박하던 배가 많을 때에는 1백50여척이나 됐다고 하는데 특히 겨울철 한강이 얼어 배가 진입하지 못할 때에는 뱃사람들은 이곳에 배를 정박시켜 놓았다가 이듬해 봄 해빙이 되면 떠나곤 했다.

소난지도는 그래서 늘 사람들로 북적대 양조장까지 있을 정도로 성시를 이뤘던 때가 있었다.

한말 의병들의 격전지

여울목 돌섬

소난지도에는 31세대 64명의 주민들이 살고 있다. 인천등지에 나가 살다가 고향땅을 다시 밟은 30대 젊은이가 몇명 있으나 2/3는 60대 이상의 노인들이다.

대난지도를 먼저 거쳐 소난지도를 찾았을 때 섬마을은 말 그대로 한적함 그 자체였다. 박정희 대통령때 간첩출몰이 잦아 한곳에 모여살라는 뜻으로 정부에서 지어준 2가구 1주택의 새마을주택이 모두 13동이 있는데 그중 한집에 동네주민들이 모여 있었다.

노환으로 곧 세상을 뜨려는 한 노인을 위문하기 위해서였다. 거나하게 약주 몇잔을 기울인 초로의 아저씨 몇분이 번창했던 과거와 쇠락한 소난지도의 오늘을 전한다.

소난지도 주민들의 생업은 어업이다. 바지락을 잡고 실치와 농어, 우럭등 고기를 잡아 연명한다. 옛날에는 큰 배를 갖고 연평도로 조기잡이를 나가는 이도 있었지만 그런 사람은 몇명에 불과했다. 또 일부는 태안, 안면도 등지에서 엽송을 베어다 인천, 서울로 실어나르는 일을 업으로 삼기도 했다.

몇평 안되는 밭에는 보리를 심었고 논은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없다.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해산물이 풍부해 그런대로 먹고 살기에 지장은 없었다.

이 섬에 학교가 생긴 것은 1960년. 삼봉국민학교 소난지 분교장으로 개장했다. 그 전엔 서당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섬인구가 점차 줄어들고 노령화됨에 따라 학생수도 줄어 1988년 소난지 교육장으로 격하돼 교사 1명만 파견되었다가 지난 92년 폐장되고 말았다. 다행스러운 것은 학교건물이 사라지지 않고 학생수련장으로 개수돼 여름에 소난지도를 찾는 단체 야영객들에게 전기료만 받고 임대해주고 있다.

과거 소난지 학교는 학생들 뿐만이 아니라 섬주민들의 교육공간이자 문화공간이었다. 20여년전 이 학교에서 3년동안 평교사로 재직한 바 있는 유항종(51세, 현 당진교육청 초등교육계장) 교사는 과일을 구경하기 어려운 소난지 어린이들을 위해 배나무를 갖다 심은 장본인.

유교사는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경운기 엔진을 이용, 자가발전시켜 육지에서 구해온 중고 텔레비젼으로 시청각 교육을 시도했던 일이 기억에 생생히 남아있다고 말했다.

“굴따는 철이 되면 어린학생들도 일을 많이 했죠. 왜냐하면 섬에 일손이 부족한데다가 굴같은 것은 물이 빠졌을 때 잠깐동안 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에 학부모들도 그걸 원했죠. 대신 물이 들어오는 저녁시간엔 할 일이 없기 때문에 그 시간엔 학부모들도 같이 학교에 나와 공부를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11명의 학생이 3개 복식학급으로 편성돼 수업을 받았다. 학부모들도 학교일에 열성이어서 교실도 한칸 더 짓고 서울 도봉구 약사회와 자매결을 맺어 서로 왕래하며 교분을 쌓기도 했다. 약사회에서는 섬동쪽에 2층짜리 수련회관을 지어놓았는데 지금도 그 건물은 마을소유로 남아있다.

소난지도에는 한말 국권회복을 위해 일본군과 싸우다 장렬히 순국한 150 의병들이 무덤이 있다. 이른바 소난지도 의병총을 일컫는다. 섬동쪽 바다쪽으로 돌출해있는 여울목 돌섬이라는 곳이 의병들의 최후 격전지였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70년대에 석문중학교 교직원들의 노력으로 소난지 의병항쟁의 역사가 발굴되기 시작해 지난 82년 역시 석문중학교 교직원들과 학생들이 성금을 모아 묘비를 세우고 묘역을 단장하기에 이르렀다. 매년 현충일날 제를 올리며 당진군에서는 지난해 2천만원을 들여 묘역을 새로 정비했다. 주민들은 이곳이 하루빨리 성역화되어서 소난지도의 큰 자랑이 되길 기원하고 있다.

생산의 현장 바다는 사라지고

현재 소난지도 주민들의 생활상은 대난지도 주민들과 크게 다를바 없다. 대호방조제의 축조와 대산3사의 영향등으로 풍성했던 어장을 보상 몇푼에 내어주고 점치기 어려운 막막한 미래에 하루하루를 내맡기고 있다.

예전 같으면 한창 굴따기에 바빴던 요즈음 아낙들은 할일없어 일손을 놀리고 있다. 굴이 찾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평생을 바닷일 속에 묻혀 살았던 소난지도 주민들, 그래서 80대 할머니가 되어도 꼬장꼬장했다는 그들이지만 아무리 궁리해 보아도 이제 이곳 바다를 예전같은 생산의 현장으로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결론에 이를 뿐이다.

간조 때면 바닷길 드러나

목새섬

-분도(糞島)-

소난지 남쪽 우무도의 바로 옆에 위치한 분도는 똥섬, 또는 목새섬이라 불린다. 암소모양의 우무도 옆에 있어 똥섬(소의 똥)이라 하고 바닷물이 빠지는 간조때면 길(목)이 드러나 목새섬으로 불리는데 소난지도 주민들은 이때마다 이곳에 가 고동을 따고 굴을 채취하곤 했다.

초지가 좋아 한때는 주민들이 염소와 토끼등을 방목하였는데 봄이 되면 이곳에 가축을 데려다 놓았다가 겨울철이 돌아오면 집으로 도로 데려왔다고 한다.

우무도와 함께 소난지 남쪽 포구앞에서 바람막이 구실을 톡톡히 해주고 있다.

고사리의 천국

-비경도(飛擎島)-

소난지도에서 남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비경도는 6만7천평으로 면적이 대난지, 소난지 다음으로 넓은 편이지만 현재 사람이 살고 있지 않다. 대략 40여년 전쯤에는 소난지도 사람 두명이 이곳에서 살았다고 하는데 그들이 세상을 뜬 후에는 아무도 살지 않고 있다.

비경도에는 고사리를 비롯, 더덕, 취나물등 산나물이 지천이어서 봄이 되면 소난지도 부녀자들이 배를 타고 건너가 나물을 뜯어오곤 했다고 한다. 지금은 낚시터로 인기있는 곳이다.

쇠같은 돌이 많아 쇠섬

-철도(鐵道)-

대난지도 서쪽 해안에서 1km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철도는 이곳의 돌이 전부 쇠같이 단단하고 모양도 쇠와 비슷해 쇠섬이라 불린다. 그러나 일부에서는 난지도 서쪽에 있는 섬이라 서섬으로 불리다 쇠섬으로 바뀐 것이라는 얘기도 있다.

5천4백평으로 당진에선 가장 작은 무인도이다.

석양의 바다에 은은히 울려 퍼지던 보월암의 만종

-우무도(牛舞島)-

소난지도 남쪽 선착장에서 손에 닿을 듯 지척에 위치한 우무도는 암소가 꿇어 엎드린 것 같은 형상이라해서 우무도(牛舞島) 또는 우모도(牛母島)라 불린다. 면적은 8천1백평.

이곳에는 지어진 연대를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된 암자가 하나 있었는데 이름하여 보월암이었다. 이곳에서 수도하던 고승이 서울로 가서 인도환생해 영조대왕이 되었다는 전설이 있는데 소난지도 주민들 대다수가 이 보월암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도 그럴것이 이 보월암이 폐사된 것은 불과 25년전인 1972년, 여름장마때 였다고 한다.(소난지도 최을룡 옹의 증언, 작고)

고종왕비인 민비의 지시로(우무도의 소유주는 민씨집안이었던 것으로 전해짐)이 보월암에는 청나라 사람이 그렸다는 산신도 한 점이 있었는데 산신령이 호랑이를 타고 있는 그림으로 매우 훌륭한 작품이었다 한다.

전해지는 얘기에 의하면 어느 기독교인이 이 산신도를 보고 미신이라하여 산신령의 눈을 찔렀는데 육지에 나가 벌을 받았다고 한다. 이 산신도는 그러나 보월암이 폐사된 후 없어졌는데 바람에 날려 없어졌는지, 도난당했는지 알 수 없으나 소난지도 주민들에 의하면 보월암의 마지막 스님이 섬을 떠날때 챙겨갖고 갔다는 것이다.

우무도에는 또 점토광산이 있었는데 광산에서 일하던 인부들이 날이 저물어 소난지도로 돌아오지 못하게 되면 보월암에서 하룻밤을 묵곤했다. 또 나무를 싣고 인천으로 가던 배들이 보월암에 불공을 드리고 나갈 때면 소난지도 어린아이들이 뱃고사 떡을 얻어 먹으러 달려가곤 했다.

저녁무렵 공양하기 위해 보월암에서 치는 범종소리가 은은하고 아름다워 보월만종은 교로 8경의 하나로 꼽혀왔다. 그러나 암자를 지키던 스님이 떠나고 찾는 이들이 뜸해진 보월암은 풍랑에 씻기고 헐려 1972년 여름장마때 무너져 버렸다. 저녁노을 아름다운 서해바다에 울리던 범종도 어디론가 사라지고 불상도 남아있지 않다. 단 목판으로 찍은 불경 하나가 석문중학교 향토유물관에 보관돼 있다.

현재 우무도에는 보월암이 있었던 절터가 그래도 남아있으며 기왓장이 흩어져 있고 암자에서 사용하던 옹달샘은 원형 그대로 보존돼 있다. 암자입구에는 커다란 느티나무와 소사나무가 있어 보월암의 역사를 묵묵히 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