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산, 몽산, 다불산, 이배산, 봉화산, 안국산, 자모산, 지름이산, 송악산, 구절산
당진의 산
당진의 산은 면천·순성에 걸쳐있는 군내 최고봉 아미산과 면천면 죽동리·송학리 사이에 있는 다불산을 제외하고는 모두 높이 3백m 이하의 낮은 산들이다.
예산과 서산의 경계를 지나는 가야산 자락이 당진까지 뻗어 아미산을 솟아 올리고 몽산과 다불산, 이배산을 거쳐 봉화산, 안국산, 자모산 등 당진의 주요산을 형성하고 있다.
당진의 산은 모두 풍수학에서 금(金)에 속하는 형상으로 봉우리가 모나지 않고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있다.
웅장한 멋은 없지만 푸근하고 정감있는 당진의 산들은 가뭄이 들땐 기우제를 지내며 애타는 농심을 하소연하기도 하고, 봉화를 피워 소식을 알리고, 성을 쌓아 요새를 구축하던 곳이었다.
부지런한 주민들에겐 아침전 운동삼아 쉬엄쉬엄 오르내리는 뒷동산이었고, 어린시절의 단골 소풍코스였다.
그러나 90년대 서해안 개발시대의 개막과 더불어 바다가 매립되면서 당진의 산은 함께 상처를 입기 시작했다.
매립에 들어가는 골재로 쓰기 위해 그나마 몇 안되는 산들은 석산개발로 파헤쳐지고 전기공급을 위한 철탑들이 곳곳에 세워지게 됐다.
기암절벽의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던 이배산 승전목, 안국사 터와 보물 석불이 가까이 있는 정미면 봉화산, 기우제를 지내던 대호지면 지름이산이 석산개발로 크게 훼손됐고 다불산과 송악산, 순성 구절산 등엔 산보다 더 높아 보이는 철탑이 능선마다 세워져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늘 곁에 있어 주었기에 무심하게 바라보며 지내오는 동안 그 무심함을 탓하기라도 하듯 제모습을 잃어가는 당진의 산.
촌로들의 기억 저편에 가물가물 남아있는 당진의 산 이야기를 찾아 나섰다.
아미산이라는 이름은
우리나라에만이 아니라
중국에도 여러곳에 이 이름을 지닌
산들이 있다고 한다.
중국의 전설 중에는
송나라 시절 아미산 신인(神人)이
천연두를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당진의 아미산도 본래의 이름은
소이산(所伊山)이었으나
천연두가 한창 유행하던 옛 시절에
질병을 막아 보겠다는 마을주민들의
소원에 따라 오늘날의 아미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
미인의 눈썹같이 아름다워라. 최고봉 아미산
당진의 명산으로 주저없이 불리는 아미산은 349.4m로 군내 최고봉이다. 면천 송학리와 죽동리, 순성 성북리에 걸쳐 솟아 있지만 당진읍내에서도 웬만큼 높은 곳에 올라서면 바로 볼 수 있는 산이 바로 아미산이다.
아미산(峨嵋山)이라는 이름은 미인의 눈썹같이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한다. 또한 이 이름 속에는 의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옛날 질병을 고쳐 보겠다는 주민들의 소박한 소망이 담겨져 있기도 하다.
아미산이라는 이름은 비단 우리나라 뿐만이 아니라 중국에도 여러곳에 이 이름을 지닌 산들이 있다고 한다.
이 산이름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알려진 것은 중국 이태백의 싯구를 통해서였다. 이태백은 중국 사천성에 있는 4대 명산 중의 하나인 아미산을 노래했는데 중국의 전설 중에는 송나라 시절 아미산 신인(神人)이 천연두를 고쳤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 전설에 따라 무서운 천연두를 막기 위해 산, 마을이름에도 아미산을 쓰는 경우가 많게 되었다고 한다.
당진의 아미산도 본래의 이름은 소이산(所伊山)이었으나 천연두가 한창 유행하던 옛 시절에 질병을 막아 보겠다는 마을주민들의 소원에 따라 오늘날의 아미산으로 이름을 바꾸게 됐다고 한다.
전설속의 아미산은 늘 후덕하고 양심이 바른 경우로 묘사되고 있다. 아미산과 몽산에 얽힌 전설중 유명한 것이 아미산 용과 몽산의 지네 전설이다.
좥옛날에 아미산에는 용이 한마리 살고 몽산에는 지네 한마리가 살고 있었다. 아미산에는 꽃이 피어 아름다웠으나 몽산은 꽃이 없어 삭막했다. 그래서 봄철이 되면 주민들은 아미산에 가서 진달래꽃을 따다가 술을 담고, 놀기도 했지만 몽산에는 꽃이 없어 사람들이 찾지 않았다. 그래서 아미산의 용은 사람들과 친하게 되었고, 몽산의 지네는 산을 찾아오지 않는 사람들을 미워하고 원망하게 되었다.
그 지네는 자기마음이 사나와 꽃이 피지 않는다는 사실도 모르고 사람들만 원망하며 급기야 사람들을 해치기 시작했다. 마음 착한 아미산 용은 지네의 행패가 괴씸해 벼르고 있던 중 어느날 꿈속에 산신령이 나타나 마을이 편안해지려면 몽산의 지네를 없애야 한다며 그 일을 해내기만 하면 곧바로 승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용은 지네를 죽일 묘안을 궁리하던 중 마을주민을 시켜 그 일을 행하기로 결심하고 사람으로 변신해 마을을 찾아갔다. 그런데 마침 한 노파의 딸이 지네에 물려 죽을 지경에 이른 광경을 보게 되었고 서둘러 약을 구해다 그 딸을 살려냈다. 노파가 용에게 은혜에 보답할 길을 물으니 용은 쑥을 두어지게 모았다가 바람이 몽산쪽으로 부는 날 아미산에서 그 쑥을 태워달라고 했다.
노파는 쾌히 부탁을 들어주어 바람이 몽산쪽으로 부는 날 모아두었던 쑥을 태웠더니 몽산은 온통 쑥연기와 내음으로 가득했다. 뒤이어 몽산쪽에서 천지가 떠나갈듯한 괴성이 들리면서 몽산 봉우리가 뚝 잘라지더니 오리밖에 쿵하고 떨어졌다. 바로 지네가 쑥연기를 쏘이고 그 독에 걸려 마지막 몸부림을 치며 죽어갔던 것이다.
그때 용은 파란하늘이 열리면서 내려온 은하수를 타고 승천하게 됐다. 그리고 지금도 면천면 성상리에는 지네가 몸부림칠 때 떨어져 나간 몽산의 봉우리가 남아있다고 한다.좦 (당진의 민속지. 1994. 재인용)
아미산 정상에는 또 네평 남짓한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신선들이 내려와 바둑을 두고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신선바위라고 이름 지어졌다.
고려 개국공신인 복지겸이 열일곱살 되던 해 아미산에 갔다가 신선바위에서 바둑 두던 신선과 만나 이야기를 나눈 뒤 과거에 급제했다는 전설도 있다. 또 주민들 사이에서는 아미산의 정기가 동남쪽으로 뻗어 순성면에 고시 합격자가 많이 나왔다는 이야기도 종종 흘러나오고 있다.
이 아미산에는 금이 매장돼 있어 일제시대 때 금광이 성행하기도 했다. 일본 예비역 군인인 구리끼라는 사람이 이 금광을 운영했는데 오늘날의 케이블카 같은 운송수단을 설치해 놓고 금광에서 캐낸 원석을 송학리 금방앗간으로 옮겨 그곳에서 구리, 철, 동 등을 선별하고 금은 장항제련소로 옮겨 갔다고 한다.
면천 송학리와 죽동리 주민들 상당수가 이곳에서 일을 했는데 대동아전쟁 당시에는 서천에 있는 돌산에 야토를 구축하기 위해 아미광산의 인부들을 끌어다 5개월간 강제노역을 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해방 이후에도 이 금광에 손을 대려는 광산계통의 사람들이 많았는데 투자비용이 만만치 않아 모두 포기했다고 한다. 6.25 때에는 국군이 인공에 부역했던 사람들을 끌어다가 이 금광에서 총살시켰다는 얘기도 있다.
아미산 역시 상처와 피로 얼룩진 우리 현대사를 비켜가진 못했던 것이다.
지금 아미산은 당진주민들의 생활 가장 가까이에 있는 등산코스로 각광을 받고 있다. 울창한 소나무 숲과 당진 전역이 한눈에 보이는 정상의 전망, 죽동 야영수련장의 약수, 오르내리는 데 두시간도 채 안 걸리는 부담없는 산행길로 30~40대 젊은 사람뿐 아니라 60대 이상의 노인들도 자주 찾고 있다.
하루 1백여명, 주말엔 3백여명 정도가 찾아와 아미산의 맑은 공기 속에서 심신을 풀고 있다. 지난해 산 정상에 조망루가 세워지는 등 늘어나는 등산인파를 맞이할 준비를 해 놓았으나 비가 내리면 등산로가 패여 산행에 불편을 주는 등 아직도 주민들의 휴식·레저공간으로서 갖춰져야 할 시설이 많이 남아 있다.
부처가 많았던 다불산의 푸근함
당진에서 군도 1호선을 따라 면천으로 향하다 보면 아미산 입구 맞은편에 푸근한 인상을 주는 산이 하나 솟아있다. 높이 317m로 아미산에 이어 두번째로 높은 산, 바로 다불산(多佛山)이다.
면천면 죽동리와 송학리, 사기소리의 경계를 이루는 다불산은 옛부터 부처가 많아 다불산으로 불리었다고 전해진다.
다불산의 봉우리는 잘려나간듯 뭉툭한 모양을 하고 있는데 이에 얽힌 재미있는 전설이 있다. 아미산과 몽산의 전설과 결말(?)이 비슷하지만 서민적이고 해학적인 맛은 더하다.
먼 옛날 면천의 산줄기가 나뭇고개(면천 삼웅리에서 면천 시가지로 넘어가는 고개)로부터 몽산을 기봉으로 아미산을 이루고 맞은편 다불산으로 건너오는 동안 몽산은 여자로 변신하고 아미산과 다불산은 남자로 변신했다. 아미남자와 다불남자는 몽산여자를 두고 서로 차지하려고 싸웠다.
신령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고약한 일이어서 두남자를 불러다 호통을 치니 아미남자는 그 즉석에서 진심으로 산이 되겠다고 맹세하고 아미산이 되었고, 다불남자도 그러겠다고 맹세한 뒤 다불산이 되었다.
그후로 아미남자는 마음을 깨끗이 비우고 맹세한 바를 잘지켜 나갔으나 다불남자는 겉모양만 산이 되었지 여전히 흑심을 버리지 않았다.
다불산의 그러한 속마음을 알아챈 신령님은 크게 노해 무시무시한 천둥번개를 일으켜 다불산의 목을 잘라 몽산앞에 떨어뜨려 놓았다. 지금도 성상2리 작골마을에는 다불산의 잘린 목이 남아 있는데 작은 당재가 바로 그것으로 일명 심술당재라 불리기도 한다.
다불산에는 죽동리쪽 산기슭에 보회사라는 작은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절터만 있으며 이곳에 1m도 안되는 작은 돌부처가 있었는데 동네아이들이 둥글리며 갖고 놀아 귀가 떨어져 나갔고 절이 폐사되면서 어디론가 없어졌다고 한다.
다불산에는 지금도 오염되지 않은 깊은 산속에서나 볼 수 있는 으름(산나무 열매)이 많이 열린다고 한다.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형국, 자모산
대호지면 마중리, 버스길도 포장되지 않은 오지중의 오지이지만 대호지의 명산인 자모산(子母山)을 가장 가까이 두고 있는 청정마을이다.
높이 255m로 아미산, 다불산에 이어 세번째로 높은 자모산은 두개의 크고 작은 봉우리가 솟아 있는데 어머니가 아들을 안고 있는 형국이라 하여 자모산(子母山)이라 이름 붙여졌다고 한다. 감투봉, 산성, 성산성, 재미산이라고도 불리며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산이라는 뜻으로 자미산(慈美山)이 본래 이름이라는 설도 있다.
자모산은 정미면의 안국산을 마주하며 그 사이에 산성리, 하성, 우산리, 봉성리, 매방리, 덕삼리, 도산리, 서산 문양리 등 무려 9개리를 품고 있다. 정상에 오르면 두 산이 품고 있는 이 마을들과 대호만이 한눈에 들어와 아름다운 풍취를 자아낸다.
마중리 주민들 사이에선 아주 오래전부터 이 산에 대단한 인물을 배출할 천하 명당자리가 있다고 믿어왔다. 그 자리를 아직 발견하지 못해 마을에서 큰 인물이 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는 하나의 신념처럼 굳어져 최근엔 외지사람들이 이곳에 가족묘를 쓰고자 산 일부를 사들였으나 명당자리를 빼앗길 것을 우려하는 주민들의 반대로 묘지조성을 못하고 있다.
자모산 입구에 걸린 ‘묘지조성 결사반대’라는 플랭카드가 주민들의 이러한 심정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터무니없는 이기주의라는 말을 들을 법도 하지만 자모산에 대한 애착과 강한 자부심의 일단이기도 하다.
자모산에도 여느 산과 마찬가지로 산 중턱과 미륵골이라 불리는 아랫 능선에 절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산 중턱의 절터엔 솟아나는 물의 양은 적으나 아무리 가뭄이 들어도 마르지 않는 옹달샘이 지금도 있으며 미륵골 절터엔 미륵이 땅밑에 묻혀있다는 전설이 있다.
당진군수가 기우제 지내던
이배산
당진읍 사기소리와 구룡리, 면천면 사기소리 경계에 있는 이배산은 높이 243m로 봉우리가 평평한 평지를 이루고 있다. 산등성이가 터져 이무기의 등처럼 생겼다 하여 이배산으로 불린다고 전해지며 산 정상 용지봉은 2백여평의 판판한 평지로 가뭄이 들땐 당진군수가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냈다.
용지봉 가까이엔 샘물도 흘러나와 나무하러 다니던 동네 남정네들이 이곳에 와 목을 축이고 잠시 쉬었다 가곤했다.
이배산에는 특히 절이 많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사기소리 사근절 마을은 절이 삭아 없어진 곳이라 하여 지금도 사근절이라 부르고 있으며, 구룡리쪽 산기슭에도 절이 있었는데 50여년전만해도 이 터에 기왓장이 남아있어 동네아이들이 기왓장을 깎아 구슬을 만들어 놀기도 했다고 한다.
또 지금은 석산개발로 훼손된 승전목(구룡리에서 면천 사기소리로 넘어가는 경계부근의 골짜기, 깎아지른 듯한 절벽과 검안천이 어우러져 당진에서 가장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던 곳)에도 절이 있었는데 이 절과 관련된 쌀바위 전설은 아주 유명하다.
좥옛날에 승전목에 작은 암자 하나가 있었고 암자 뒷쪽에 이상한 바위 하나가 있었다. 이 절은 본래 가난해 스님들이 항상 양식걱정을 하다가 견디다 못하면 다른 절로 가게 되었다. 요행히 나이드신 스님과 상좌스님 둘만이 수행을 하고 있었는데 바로 암자 뒤 바위에서 쌀이 한톨씩 떨어져 그것으로 연명하면서 살아갔던 것이다.
그 바위에서 떨어지는 쌀은 하루에 4홉 정도로 두 스님이 겨우 굶주림을 면할 정도였으나 상좌스님은 늘 배고품에 시달려야 했다.
그래서 노스님이 잠깐 외출한 사이 상좌스님은 쌀이 나오는 바위구멍을 크게 뚫어 놓으면 쌀이 많이 나오겠지 생각하고 꼬챙이로 구멍을 뚫었다. 그러나 어찌된 영문인지 바위에서는 쌀이 아예 한톨도 나오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 스님들은 다른 곳으로 떠났고 암자도 허물어지고 말았다. 지금은 물론 절의 흔적도 없고 그 바위만 쌀바위란 이름으로 전해지고 있다.좦 (당진민속지. 1994. 재인용)
이배산은 삐비산으로 불리기도 한다. 왁새풀이 유난히 많았기 때문인데 동네아이들이 삐뿌리 가운데를 한주먹씩 뽑아 먹곤 했다.
또 여우와 늑대가 많이 살았었고 사근절 뒤편의 금화바위라는데서 불을 지피면 연기가 대바위(구룡검문소 바로 앞의 큰바위)로 나왔다는 전설도 전해 내려오고 있다.
석산개발이 시작되기 전만해도 인근 동네 노인들이 아침 산책삼아 산을 자주 오르내려 등산로가 있었으나 지금은 수풀에 우거졌다.
어이 홀로 솟았나 외로운 산(孤山), 송악산
송악면 중흥리, 석포리, 월곡리, 정곡리 경계에 있는 송악산은 당진에서 중흥리에 다다르기 전 도로 왼편에 바로 보이는 높이 148.2m의 야산이다. 송악산은 대개의 산들이 산맥을 이루며 연결되어 있는 것과 달리 혼자 솟아있어 고산(孤山, 외로운 산)이라고도 불리었으며 본래는 숭학산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당진의 옛지도에도 숭학산으로 표기되어 있으며 조선 철종 때 세워진 이 산내에 있는 묘비석에도 숭학산으로 새겨져 있다고 한다. 1914년도 일본인들이 행정구역을 개편할 당시 이름을 잘못 고치는 바람에 송악산이 되었다고 한다.
송악산 정상에는 동학군들이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쌓았다는 성이 있다. 석성과 토성의 혼합형태로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있는데 이곳에서 무려 3천여명의 동학군들이 모여들어 싸움을 벌였다고 한다.
이곳에는 또 숭학사라는 절이 있었다. 송악초등학교 뒷편으로 오르다 보면 그 터와 주춧돌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주춧돌이 박힌 면적이 1백평에 이르러 규모가 큰 절이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이 절이 언제 없어졌는지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연산군의 불교 말살정책으로 없어졌다는 설이 있다.
송악산 중턱쯤에는 장수바위라는 큰 바위가 하나 있다. 이 바위엔 사람의 손과 발모양 같은 자국이 나 있는데 옛날 힘센 장수가 이 바위를 짚고 일어서다 찍힌 자국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바위 외에도 송악산엔 기암괴석이 많아 무속인들이 지성을 드리곤 했는데 70년대 전대 저수지를 만들때 축대로 쓰이는 바람에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고 한다. 주민들의 반대로 유일하게 장수바위 하나만이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다.
송악산은 높이는 낮지만 낮은 해안지형의 한 가운데에 솟아있는 유일한 산으로 정상에 오르면 시야가 무척 넓다. 남쪽으로는 예산 덕숭산과 서산, 경기도 평택, 천안까지 건너다 보여 가슴이 확트임을 이내 실감할 수 있다.
비록 산 중턱에 송전탑과 이동통신의 기지국까지 세워져 미관을 많이 헤치고 있으나 주민들은 이곳을 아름다운 공원으로 가꾸길 희망하고 있다.
<도움말 주신분>
○인주환(면천면 송학리) ○인치승(당진읍 의보 당진지사장)
○윤성의(전 면천우체국장) ○남윤우(대호지면 마중리)
○박종대(당진읍 구룡리) ○이정식(당진읍 구룡리)
○이웅렬(송악면 중흥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