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편집자주>마을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지명 속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전설,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라진 마을, 농촌 고령화로 전통의 맥이 끊길지 모르는 자연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마을 아카이브 IV - AI 디지털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당진지역 마을의 역사·문화·인물·전설·생활사를 기록하는 ‘우리마을 이야기’ 기획취재를 연재한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사업 지원을 받아 취재한 것입니다.

당진(唐津)의 시작과 영전(領前)
당진포리는 당진이라는 지명이 탄생한 상징적인 장소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중국 산둥반도와 가까운 지리적 여건으로 인해 당나라와의 교역이 활발했던 ‘당나라 나루(포구)’라는 뜻에서 당나루, 즉 당진포(唐津浦)라 불렸다.
당진포1리 마을의 별칭인 ‘영전(領前/營前)’은 군사적 배경에서 유래했다. 과거 해안가 근처에 당진포영(군대)이 주둔해 있었는데, 이 진영 앞에 위치한 마을이라 해서 영전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 마을 주민들의 설명이다. 최천재 노인회장(76)은 이에 대해 “성(진성) 앞이다 해서 영전”이라고 설명했다.
갯벌과 염전, 그리고 섬들의 전설
1980년대 대호방조제가 축조되기 전, 당진포1리는 골짜기마다 바닷물이 밀려들던 포구 마을이었다. 김영구(89) 어르신은 “옛날에 여기 바닷물 들어올 때 지게 지고 나가 고기도 잡아먹고 망둥어 낚시도 하고 그랬다”라고 회상했다.
마을 앞에는 ‘개구리섬’과 ‘뱀섬’이 있었다. 이 섬에는 주민들 사이에 구전돼 전해져 오는 흥미로운 전설이 있다.
주민들에 따르면 섬 모양새가 개구리를 뱀이 잡아먹으려는 형상인데 신기하게도 뱀섬 뒤에 황새산이 버티고 있다. 주민들은 “황새가 뱀을 노리고 있으니 뱀이 개구리를 못 잡아먹는 거지. 그래서 우리 마을에 큰 화가 없고 사람들이 명줄이 길다는 얘기가 있었다”라고 전했다. 주민들에게 이 섬들은 어린 시절 소풍을 가던 아스라한 추억의 장소이기도 하다.
과거 당진포1리 주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은 배였다. 김영구 어르신은 “해창에서 배를 타고 인천이나 서울을 다녔다”라며 “난지도를 거쳐서 섬 여러 곳을 돌며 꼬박 반나절 이상 가야했다”고 말했다.
주민들에 따르면 과거 인천에서 출발한 여객선이 난지도를 거쳐 마을 인근 해창까지 들어왔으며, 이를 통해 인천과 서울을 오갔다. 지금처럼 버스 등 대중교통이 발달하지도 않았으며, 버스를 타러 나가기에는 한참을 걸어나가야만 했다.
30만평 규모의 진명염전
또한 마을에는 약 30만 평 규모의 ‘진명 염전’이 있었다. 진명재단이 운영하던 염전 중 제일 규모가 컸던 이 염전에서 일했다는 김영구 어르신은 “진명 염전이 이 근방에서는 제일 컸지. 여기 당진포리 사람들이 거의 다 염전에 다녔다”라며 “나도 염부장으로 일했는데, 염전 일이 힘들었다. 먹는 것도 부실하고 그때 보리쌀 네 가마인가를 월급으로 받았다”라고 당시의 고단했던 상황을 회상했다. 배창연 어르신(84) 또한 “염전 살이는 무척이나 힘들고 고된 일”이라며 “월급이라고 해봐야 얼마 못 탔다”고 전했다.
당시 마을 주민 40여명이 넘게 염전에서 염부로 살았다. 지금이야 경지 정리된 논과 개간한 황토밭에서 농사를 지으며 조금은 여유 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모두가 힘든 시기에서 염전의 염부는 몸은 힘들지만 안정된 수입수단이었다.

황토가 일군 옥토와 고구마
당진포1리의 토양은 비옥한 황토다. 과거 기록에 따르면 이곳은 골짜기마다 바닷물이 드나들던 퇴적지형으로, 대대로 옥토를 선물 받은 지역이다. 최천재 노인회장은 “다른 마을에 비해 황토가 많고, 또 황토에서 자란 곡식이 맛이 좋았다”라며 “고구마가 우리마을 지형과 황토에 잘 맞아 많은 마을 주민들이 고구마를 재배하고 있다”고 말했다.
현재 이곳에서 생산되는 황토고구마는 품질이 좋아 타 지역보다 높은 가격에 직거래로 판매되는 마을의 효자 작물이다.
마을은 김씨, 이씨, 최씨를 중심으로 형성된 집성촌이다. 이종복 노인회 총무(72)는 “우리 증조 할아버지도 여기 사셨어. 산소도 여기 있고. 그러니 140~150년 전부터 여기 사신 거”라고 집안의 역사를 밝혔다.
과거에는 마을 잔치가 열리면 돼지를 잡고 음식을 나누는 문화가 활발했다. 배창연 어르신은 “마을에 잔치 있으면 다 같이 모여 돼지도 잡고 음식도 차렸다. 집 지붕에 볏짚을 올릴때면 마을주민 모두가 합심해 서로 도우며 살았다”라며 “근데 이제 그런 것도 없어지고, 나이 먹으니 하나둘 세상을 떠나 남자들도 그리 많이 남아 있지 않게 됐다”고 변화된 풍경에 아쉬움을 표했다.
현재 남아 있는 마을의 공동체 문화로는 ‘장승제’가 대표적이다. 이종복 노인회 총무는 “91년도부터 이장 봤는데 그 당시 해마다 50대 남자들이 사고로 많이 돌아가셨다”라며 “그때부터 장승제를 지내기 시작했는데 27년째 이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마을 사업의 부침과 고령화의 현실
당진포1리는 농촌체험마을의 성공 사례로 꼽히며 삼성, 한강미디어고 등 10여 개 기관과 자매결연을 맺어왔다. 정보화 마을, 팜스테이, 녹색 농촌 체험마을 등 다양한 국비 지원 사업(약 4억~2억 원 규모)을 통해 도시민 유치에 앞장섰다.
그러나 현재는 주민들의 고령화와 인구 감소로 인한 마을의 존립을 걱정하고 있다. 1970년대 100여 가구, 250명 이상이었던 인구는 현재 70여 가구로 줄었으며, 독거 노인의 비중이 높아졌다. 최천재 노인회장은 “젊은 층이 부족해지면서 체험 마을 운영 역량이 줄어들고 정부 지원도 감소하여 프로그램들이 자연스럽게 축소되었다”고 설명했다.
이종복 총무는 “남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꾸 사람이 감소해 마을이 존립할지 그게 걱정스럽다”고 토로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을은 경로당을 중심으로 결속하고 있다. 최천재 노인회장은 “경로당에서 주 5일을 마을 주민들과 함게 점심 식사를 진행하는데 호응도가 좋아 앞으로도 이어 나갈 계획”이라며 “앞으로도 황토 농산물의 품질을 유지하고 생활 복지를 강화해 살기 좋은 마을을 유지했으면 한다”는 바람을 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