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참전용사 박윤식 옹
6.25 참전용사 박윤식 옹

고향에서 양복 기술을 배워 서울에서 새로운 삶을 꿈꾸던 청년은 갑작스레 발발한 전쟁으로 일상을 잃었다. 그는 사선을 넘나드는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뒤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76년 전인 1950년, 스물한 살이었던 청년은 이제 아흔일곱의 노인이 됐다.

가장 가난한 집 자식으로 태어나

박윤식 옹은 1930년 지금 살고 있는 채운동에서 태어났다. 그는 자신의 집을 “동네에서 가장 가난한 집”이었다고 회고할 만큼 어린 시절 극심한 가난 속에서 자랐다. 해방되던 해인 1945년, 16세에 당진초등학교를 졸업한 박윤식 옹은 동네 선배의 권유로 화성양복점에 들어가 양복 기술을 배웠다. 기술을 익힌 그는 더 큰돈을 벌기 위해 서울 용산으로 올라가 양복점 직공으로 일했다. 박윤식 옹은 “아침에 도시락 두 개를 싸 들고 출근해 야간 통행금지 시간인 밤 11시 전까지 일했다”고 회상했다.

마지막 열차 타고 고향으로

약 4년간 치열하게 일하던 박윤식 옹은 어느 날 새벽 전쟁을 맞닥뜨렸다.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라디오 방송에서 전쟁이 났다는 소식이 들렸어요. 새벽부터 지프차가 돌아다녔고 장교들에게 원대복귀를 명령하는 방송이 나왔죠. 얼마 지나지 않아 북한군 비행기가 용산 일대를 폭격하기 시작했어요. 다음 날 저녁이 되자 미아리 쪽에서 손수레와 재봉틀 등을 끌고 피난민들이 내려오더라고요.”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박윤식 옹은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짐을 챙겨 서울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난 친구는 “서울역에 가도 기차가 모두 끊겼으니 가지 말라”며 만류했

다. 하지만 그는 문득 큰아버지가 봐주었던 토정비결 점괘를 떠올렸다.

박윤식 옹은 “그해 6월에는 남의 말을 들으면 큰 해를 입으니 절대 듣지 말라는 말이 생각났다”며 “친구의 말을 무시하고 서울역으로 향했다”고 말했다.

서울역에 도착하자 기적처럼 대전으로 향하는 마지막 임시열차 한 대가 남아 있었다. 박윤식 옹은 그 열차를 타고 극적으로 천안까지 간 뒤 차를 얻어 타고 당진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내가 열차를 타고 한강다리를 건넌 바로 그날 저녁, 북한군의 남하를 막기 위해 다리가 폭파됐다”고 덧붙였다.

첫 휴가를 받아 나온 박윤식 옹과 그의 아내 이영숙 씨
첫 휴가를 받아 나온 박윤식 옹과 그의 아내 이영숙 씨

전쟁으로 이어진 첫사랑

1950년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박윤식 옹은 초등학교 시절 짝사랑했던 이영숙 씨와 다시 만나게 됐다. 박윤식 옹은 “초등학교 때 아내를 보기만 해도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가난한 집 아들이었던 나는 부잣집 딸이던 아내에게 말 한마디 건네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이후 인천으로 이사했던 이영숙 씨 가족은 전쟁으로 집을 잃고 당진으로 돌아왔고, 혼처를 찾던 중 박윤식 옹과 인연이 닿아 결혼을 약속했다. 하지만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입영통지서를 받았다. 공주로 입대하러 가던 그는 우연히 소집 대상 기준을 확인했고, 호적상 생년월일이 해당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박윤식 옹은 “결혼식을 앞두고 있다고 항의해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며 “덕분에 1951년 4월 아내와 무사히 결혼식을 올렸다”고 말했다.

눈 덮인 참호가 살린 목숨

그러나 결혼 후 석 달이 지난 무렵 정식 소집영장이 다시 날아왔다. 한 달간 군사훈련을 받은 뒤 그는 강원도 양구 일대 최전선인 1200고지에 배치됐다. 양구와 화천 일대를 오가며 숱한 전투를 치른 그에게 전쟁 기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눈 덮인 참호 속에서 깜빡 잠이 드는 바람에 소대장과 전우들을 잃었던 날이다.

11월 무렵, 중공군과 불과 50m 거리를 두고 서로의 목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곳에서 한 시간 넘게 격렬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총격전이 끝난 뒤 그는 참호 안에서 보초를 서게 됐다. 박윤식 옹은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했는데 눈보라를 피하기 위해 북쪽을 등지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며 “새벽 4시쯤 쏟아지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함께 보초를 서던 동료들과 잠이 들고 말았다”고 말했다. 이어 “동이 틀 무렵 깨어보니 우리가 잠든 사이 중공군이 고지를 점령해 버렸다”며 “부대 난로 연통 구멍으로 수류탄을 집어넣어 소대장을 비롯한 전우들은 숨지거나 포로로 끌려갔다”고 말했다.

아울러 박윤식 옹은 “우리가 있던 참호만 눈에 덮여 적들이 미처 발견하지 못해 살아남을 수 있었다”며 “그때 잠들지 않고 제대로 지켰더라면 소대장과 전우들이 죽지 않았을 텐데, 지금도 나 때문에 죽은 것 같은 생각이 든다. 7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인생에서 가장 가슴 아프고 죄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제대 후 ‘당일양복점’ 개업

무전병으로 복무했던 박윤식 옹은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되던 날을 생애 가장 기뻤던 순간으로 꼽았다. 그는 “달 밝은 밤 무전기를 통해 10초 전, 9초 전 카운트다운이 흘러나왔고 밤 12시 정각이 되자 포성이 거짓말처럼 멈췄다”며 “방공호 안에 있다가 ‘이제 살았구나’ 하는 생각에 밖으로 나왔다. 그날이 내 생애 가장 기쁜 날이었다”고 말했다.

이후 남은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55년 9월 제대해 가족이 있는 당진으로 돌아왔다. 그는 1962년 읍내동에 ‘당진에서 제일가는 양복점’이라는 의미를 담은 ‘당일양복점’을 열었다.

박윤식 옹은 “군청 직원과 은행원, 교직원 등 공무원들이 주로 가게를 찾았다”며 “세월이 많이 흘러 이제는 손님들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단골이었던 최종성 전 당진교육장과 바둑을 두곤 했다”고 회상했다.

당시 맞춤 양복은 쌀 한 가마니 값의 세 배에 이를 정도로 귀한 옷이었다. 그만큼 원단 가격도 비싸 도난 사고가 잦았다. 그는 “도둑 맞을까 봐 밤이면 원단을 나무 상자에 담아 자는 방 안에 보관하곤 했다”며 “워낙 원단이 많다 보니 도난 사실조차 모르고 지낸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어느 날 경찰로부터 연락이 왔는데, 예산 신례원 버스 검문소에서 붙잡힌 절도범이 당일양복점에서 원단을 훔쳤다고 자백했다더라”며 “그제야 도둑맞은 사실을 알게 됐다”고 덧붙였다.

그는 양복사로 62년 넘는 세월을 보낸 뒤 은퇴했다. 박윤식 옹은 “나는 운 좋게 살아남아 가정을 이루고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었다”며 “하지만 지금도 어려운 형편 속에서 살아가는 참전유공자들이 많다”고 말했다. 이어 “이제는 많은 유공자가 세상을 떠났다”며 “남아 있는 유공자들이 보다 나은 대우를 받으며 살아갈 수 있도록 국가가 더 많은 관심과 지원을 해주길 바란다”고 전했다.

당진초 6.25참전유공자 명비를 찾은 박윤식 옹
당진초 6.25참전유공자 명비를 찾은 박윤식 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