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주> 마을을 품고 있는 산과 들, 오랜 세월 이어져 온 지명 속에는 저마다의 유래와 전설, 그리고 잊혀진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그러나 산업화와 도시화 속에 사라진 마을, 농촌 고령화로 전통의 맥이 끊길지 모르는 자연마을들이 늘어나고 있다. 본지는 ‘마을아카이브 IV - AI 디지털 기록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당진지역 마을의 역사·문화·인물·전설·생활사를 기록하는 ‘우리마을 이야기’ 기획취재를 연재한다.

※ 이 기사는 2026년 충청남도 지역미디어사업 지원을 받아취 재한 것입니다.

봉황이 숨어들었다는 은봉산과 조선시대 봉수대가 있었던 봉화산. 두 명산이 병풍처럼 둘러선 산자락 아래 동향으로 자리 잡은 수당리는 정미면에서 가장 큰 마을이다. 보물로 지정된 석불과 석탑, 그리고 700년 전 주민들이 후손의 안녕을 빌며 바위에 새긴 매향비까지. 수당리는 마을 전체가 살아있는 역사책이다.

숯에서 따온 ‘수(壽)’, 원당골에서 따온 ‘당(堂)’

수당리(壽堂里)라는 이름에는 이 마을의 살림살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본래 수당리는 높고 맑은 산에 참나무가 많아 숯을 굽던 마을이었다. ‘숯’의 음을 한자 ‘수(壽)’로 옮기고, 마을 안 자연부락인 원당골의 ‘당(堂)’자를 합쳐 수당리가 됐다는 것이 정설로 전해진다. 한편 마을에서는 으뜸마을이라는 뜻의 원당동과 명(命)이 긴 마을이라는 뜻의 수동에서 한 자씩 따왔다는 이야기도 함께 내려온다.

기록에 따르면 마을주민들은 “명이 긴 동네라 하여 수곡동이라 불렸다”라며 “옛날에는 100세 노인도 많았는데 지금은 없다. 그래도 요즘 시골동네 어딜 가나 그렇듯, 수당리에도 노인들이 많다”고 설명했다.

수당리가 속한 정미면(貞美面)은 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개편 당시 만들어졌다. 기존 해미군 소속이었던 정해(貞海)의 ‘정’자와 여미(餘美)의 ‘미’자를 한 자씩 따서 제정한 것이다. 이때 해미군에서 서산군으로 편입되며 염솔면과 일도면 등을 통폐합해 18개 리를 관할하게 됐고, 1957년 11월 6일 법률 제456호에 의해 대호지면과 함께 당진군으로 편입됐다. 1973년 여미리가 서산군 운산면으로 넘어가면서 현재의 17개 리 체제를 갖췄다. 그러나 이 지역의 역사는 행정구역 개편보다 훨씬 깊다. 기록에는 안국사지 부근에 고인돌이 존재했을 만큼 선사시대부터 사람이 살던 땅이었고, 삼한시대에는 마한에 속했다. 백제시대 여촌현(餘村縣), 통일신라시대 여읍현(餘邑縣), 고려시대 여미현(餘美縣)으로 시대마다 이름을 바꿔가며 이어져 왔고, 조선 태종 때 해미현으로 통합된 이후 염솔면, 일도면 등으로 편제됐다.

5개 반으로 이뤄진 수당리는 골짜기마다 이름이 있다. 아래숫굴 또는 하수동이라고도 불렸던 아랫말이 1반, 중간말이 2반, 윗말이 3반이다. 윗말은 옛날 주위 산에 삼림이 울창해 숯을 많이 구웠던 곳이다. 원당골이 4반, 안국사지 주변 부락인 안국이 5반이다.

자연마을 곳곳에는 지형과 내력을 딴 옛 지명이 살아 있다. 참나무가 많아 사방에 숯가마가 있었던 숯골(炭洞)은 근래 발음이 변해 ‘숙골’이라고도 불린다. 원당골은 옛날 원당(願堂)이 있던 골짜기라 하여 붙은 이름이다. 곤남이골은 경사가 워낙 심해 벽과 같은 고개를 넘어야 하는 곳이라 ‘곧너미골’이라 불리던 것이 변한 지명으로, 송생이골과 봉이골로 이어진다. 윗숯골 아래 펼쳐진 중간말은 토질이 비옥해 밭농사가 잘되는 곳으로 꼽혔다.

이 밖에도 옛날 큰 방죽이 있었다는 방죽골, 안국사 입구에 펼쳐진 깊은 골짜기인 큰목골, 매방리 방향으로 넘어가는 수당리재(갈티재) 밑에 자리한 갈티골, 방죽골 아래쪽의 의정골, 대운산리 가지막과 인접한 호구마루 등 골짜기마다 저마다의 이름과 사연이 내려온다.

천년고찰의 흔적, 안국사지

수당리의 은봉산 중턱에는 당진을 대표하는 유적인 안국사지가 자리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백제 말엽 안국사가 창건돼 100여 명의 승려가 수도했다고 전해지지만, 정확한 창건 시기는 알 수 없다. 다만 출토된 기와 조각에 새겨진 ‘태평십년’ 명문이 중국 요나라 연호로 고려 현종 21년(1030년)에 해당해, 고려시대에 크게 번창한 사찰로 추정된다. 안국사는 조선 후기에 폐사됐고, 1929년 승려 임용준이 주지가 되어 다시 일으켰으나 이후 또다시 폐사됐다.

지금 절터에는 세 가지 문화유산이 남아있다. 보물 제100호 석조여래삼존입상과 보물 제101호 석탑, 그리고 배바위에 새겨진 충청남도기념물 제163호 매향암각이다.

석조여래삼존입상은 중앙의 본존불과 좌우 협시보살로 이뤄진 고려시대 불상이다. 머리에 커다란 돌을 이고 있는 모습이 특징적이며, 굴곡 없이 덩어리진 형상은 고려시대 충청도 지방에서 유행하던 괴체화 양식을 잘 보여줘 충주 미륵리 석조여래입상과 함께 주목받고 있다. 특히 2004년 시굴조사에서 땅에 묻혀 있던 ‘발’이 발견됐는데, 발을 가진 석불은 전국에서도 안국사지 석불이 거의 유일하다.

석불 아래 자리한 석탑은 높이 3m로 원래 5층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현재는 2층 이상의 몸돌이 사라져 1층 몸돌과 지붕돌 위에 2~4층의 지붕돌만 포개져 있다. 1층 몸돌이 작아 받침돌과 지붕돌 사이에 끼워진 듯한 모습 등이 고려 중기 석탑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문화유산으로 평가받는다.

배바위 매향비
배바위 매향비

배바위에 새긴 700년 전의 기원

안국사지에서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삼존불 뒤에 자리한 거대한 바위다. 성인 십여 명이 둘러서야 할 만큼 큰 이 바위는 가로로 길게 누운 모양이 배 같기도, 고래 같기도 해 ‘배바위’ 혹은 ‘고래바위’라 불린다. 이 바위에 두 개의 매향비가 새겨져 있다.

매향(埋香)이란 미륵신앙에 바탕을 둔 고려 후기 민간불교 의식이다. 향도(香徒)를 조직한 주민들은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갯벌에 향나무를 묻고, 그 사실과 소망을 바위에 새겼다. 천년의 시간을 견딘 향나무는 '향 중의 으뜸'인 침향(沈香)이 되고, 후손들이 그 침향을 피워 부처님께 올리면 큰 복을 받는다고 믿었다. 현실의 고통을 후손들만큼은 겪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이었다.

배바위에 새겨진 비문을 풀이하면 ‘경오년 2월 여미 북쪽 마을 입구의 동쪽 갯가에 결웅스님의 향을 삼가 묻고 향도일동이 비석을 세워 표하노라’, ‘경술년 시월 서쪽의 염솔마을에 나다니던 목공이 이곳에 묻혔노라’라는 내용이다. 연대는 고려 말인 1310년 무렵으로 추정되며, 국내에서 확인된 매향비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으로 꼽힌다. 한 바위에 매향비가 두 개나 새겨진 것도 유일한 사례다. 왕권 교체 등으로 어지러웠던 당시 세태 속에서, 수당리 주민들이 후손의 안녕과 공동체의 평온을 얼마나 절실히 빌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배바위에는 전설도 깃들어 있다. 고려 초 중국에서 난리를 피해 배를 타고 표류하다 수당리 앞바다에서 구조된 가씨 성의 목공이 은혜를 갚고자 어부 부부에게 배를 만들어 줬는데, 그 배가 튼튼하고 빠르다는 소문이 전국에 퍼지면서 주문이 쇄도했다고 한다. 가씨는 늙도록 번 돈을 곡식으로 바꿔 안국산 바위 굴에 쌓아뒀는데, 어느 날 큰 배를 만들던 중 벼락이 떨어져 만들던 배가 바위로 변하며 그를 덮쳤다는 이야기다. 가씨가 쌓아둔 곡식은 온 백성이 하루를 먹을 수 있는 양이었다고 전해진다.

매향비의 기록은 전설로만 남지 않았다. 1975년 4월 정미면 승산리 구티에서 침향목이 실제로 발견된 것이다. 구티는 바닷물과 민물이 만나는 곳으로, 매향비문의 기록과 일치한다. 수령 1300~1500년으로 추정되는 이 침향목은 높이 2m, 둘레 2m가량으로, 국내 매향비 유적 가운데 침향목이 실물로 발견된 것은 배바위가 처음이었다.

마을에서 배바위는 기자(祈子) 신앙의 대상이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은 “매년 사월초파일에 배바위에 올라 본존불상 머리에 돌을 던져 올려놓으면 아들을 낳는다 해서 불상 머리 위에 수많은 돌이 얹어져 있었다”고 전했다.

수당리 이정원 이장
수당리 이정원 이장

함평 정씨 집성촌, 한학의 마을

수당리는 함평 정씨의 집성촌이다. 정미면지 등 기록에 따르면 시조 정언겸의 11세손인 숙륜의 차남 효창의 후손들, 즉 면천공파가 수당리로 낙향해 자리를 잡은 이래 일제시대부터 집성촌을 이뤄왔다. 1970년대 중반에는 전체 150여 호 가운데 80%가 정씨 문중이었고, 2004년에도 총 104가구 중 60여 호가 함평 정씨였다.

정씨 문중을 중심으로 수당리에는 유학이 뿌리내리고 한학이 성행했다. 한말에서 해방 무렵에 이르는 당진의 대표 한학자 방재 정재학이 평생 수당리에 머물며 후학을 양성한 곳이 바로 이 마을이다.

정씨 문중이 자랑하는 또 다른 인물은 정원환이다. 1919년 4월 4일 정미면 천의리에서 대호지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났을 때, 당시 55세였던 정원환이 수당리 시위를 이끌었다. 정원환을 중심으로 마을 사람들은 봉화산 봉수대에 불을 놓고 만세를 불렀다고 전해진다.

수당리는 고목의 마을이기도 하다. 보호수로 지정된 고목만 두 그루이고, 수백 년 된 나무들이 마을 곳곳에서 여전히 푸른 잎을 틔우고 있다. 수당골의 500년 된 은행나무에는 어사 박문수가 쉬어갔다는 이야기가 내려오고, 원당골에는 수령 520년으로 추정되는 높이 15m의 느티나무가 마을을 굽어보고 있다.

감나무도 많았다. 바람이라도 세차게 분 날에는 인근 마을에서 떨어진 감을 주우러 오기도 했었고.

수당리 마을회관
수당리 마을회관

고령화 속 자연휴양림으로 여는 미래

113가구가 사는 수당리의 노인회 등록 65세 이상 노인은 108명. 이 가운데 3분의 2가량이 할머니들이다. 아이들이라고는 다문화가정 자녀 몇 명이 전부라는 어르신들의 말에서 농촌 고령화의 그늘이 묻어난다.

그러나 수당리에는 새로운 변화가 찾아오고 있다. 정미면 수당리 산 106번지 외 15필지 일원 55만㎡가 ‘당진 자연휴양림’으로 지정·고시돼 현재 당진시는 사업비 75억 원을 확보해 2029년까지 산책로(탐방로)와 산림문화휴양관, 트리하우스, 방문자센터 등을 갖춘 자연휴양림을 조성할 계획이다.

이정원 이장은 “자연휴양림이 조성되면 많은 시민이 휴식을 취하고 산림의 가치를 알게 될 것”이라며 “당진 자연휴양림이 산림관광사업의 거점으로 자리매김해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원당지에서 출발해 봉화산과 안국사지를 거쳐 돌아오는 등산코스에는 평일에도 등산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700년 전 주민들이 매향비에 새겼던 기원처럼, 후손들의 안녕을 빌던 그 산자락이 이제 시민의 쉼터로 다시 태어날 채비를 하고 있다.